전염병 발생, 37년 전과 비슷한 수준 손만 깨끗이 씻어도 70% 예방 가능

작년 가을, 직장인 이호민(43·가명)씨는 한달 가량 잦은 기침이 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하려는데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깜짝 놀라 동네 병원에 가서 X선 검사를 했더니 의사가 "결핵이 의심된다"며 정밀검사를 하라고 했다. 큰 병원에 갔더니 "다행히 초기 결핵이어서 입원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된다"고 했다. 이씨는 "70년대 못 살던 시절에나 있던 병에 내가 왜 걸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유행하던 '후진국 형 전염병'이 우리나라에 다시 창궐하고 있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결핵, 장티푸스,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들은 2000년을 기점으로 크게 늘어 요즘은 '대한민국 대표 전염병'이 됐다. 최근 4~5년 전부터는 머릿니도 다시 나타나 현재는 우리나라 어린이 100명 중 약 4명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외부 유입이 확실한 장티푸스, 말라리아와 달리 머릿니나 결핵은 2000년 이후 다시 늘어난 뚜렷한 원인조차 알 수 없다. 의학계에선 어린이의 면역력이 약해진 것, 노인 인구의 증가, 찜질방 등의 증가 등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다. 예전보다 영양과 위생상황이 월등이 좋아졌는데 왜 후진국 형 전염병들이 다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질병관리본부가 집계한 79종의 법정 전염병 발생 환자수는 2004년 8994명, 2005년 1만3480명, 2006년 2만3499명, 2007년 3만4954명으로 4년 새 4배 가량 늘었다. 집계에서 제외된 결핵균 감염환자도 2004년 3만1503명, 2005년 3만5269명, 2006년 3만5361명(결핵협회 집계)이어서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발생하는 전염병 환자 수는 집계된 것만 6만~7만 명에 이른다.
결핵을 제외한 2007년 전염병 환자 수(3만4954명)는 우연히도 1970년 결핵을 제외한 전체 전염병 환자수인 3만264명과 거의 유사하다. 전염병 분류방법과 집계에서 약간의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37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염병이 생기는 빈도는 거의 같은 수준인 셈. 인구 10만 명당 발생률이 가장 높은 전염병도 1970년 홍역·말라리아·장티푸스·백일해, 2000년 홍역·말라리아·볼거리·쯔쯔가무시병으로 거의 비슷하다. 1960, 70년대 유행하던 염병(장티푸스의 속어) 대신 들쥐에 기생하는 진드기에 물려 발생하는 쯔쯔가무시병이 많아진 것이 눈에 띄는 차이점일 뿐이다.
특히 결핵, 말라리아, 수두, 브루셀라증, 유행성이하선염(볼거리)은 2000년 이전까지 발생 빈도가 꾸준히 감소하다 2002년부터 급속히 늘어난 대표적인 '21세기형 전염병'이다.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정두련 교수는 "이런 현상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매개 곤충의 확산과 교통의 발달로 인한 세계의 1일 생활권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의학자들은 또 각종 예방백신, 치료제 개발로 전염병의 치료 여건은 나아졌지만, 신종 전염병이 자꾸 생기므로 전체적인 전염병 빈도는 줄지 않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해외 여행의 증가로 외국의 토착 전염병이 유입될 가능성이 크므로 전염병 환자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런던동물학회 케이트 존스 박사는 네이처지에 발표한 '새로운 전염병'이란 논문에서 "사스(Sars), 조류독감, 니파(Nipah) 바이러스와 같이 새로운 전염병 발생의 71%는 야생동물로부터 기원된 병원체로, 전세계 보건문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인간은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인류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 전염병관리팀 권준욱 팀장은 "이런 전염병들은 물, 공기, 곤충, 동물, 사람을 통해 옮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차단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현재로선 손만 깨끗이 씻어도 70%의 전염병은 예방 가능하므로 특히 개인위생에 신경을 써 달라"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