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자의 뺑소니는 무죄? 신경외과 전문의에게 물었다

입력 2020.10.06 08:00

"기억상실 가능… CCTV만으로 판단 한계"

운전 중 어지럼증 느끼는 여성 사진
뇌전증 환자는 뇌전증 발작과 함께 일시적 기억상실을 경험하는 경우가 흔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교통사고를 낸 후 도주한 A씨가 뇌전증으로 인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A씨가 실제로 사고 당시 뇌전증 발작을 일으킨 게 맞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고를 일으킨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뇌전증은 과거 '간질'로 불리기도 했는데,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 외에 '일시적 기억상실'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일반인들에겐 생소하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봤다.

"뇌전증 환자, '일시적 기억상실' 겪을 수 있다"
지난 2018년 9월, A씨는 차선 변경 과정에서 B씨의 차량을 들이받고 도주했다. 이어 방향을 틀다 다른 차량을 연이어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피해자 2명이 전치 2주의 상해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A씨는 사고 현장에서 도주했다. 서울중앙지법은 ▲A씨가 2016년 뇌전증을 진단받은 점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A씨의 표정에서 거짓말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증언한 점 ▲사고 직후 A씨 남편이 경찰관과 통화할 때 A씨에게 기억상실 증상이 있다고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무죄 선고를 내렸다.

A씨의 경우처럼, 실제 뇌전증 환자는 '일시적 기억상실'을 겪을 수 있는 걸까. 길병원 신경외과 박광우 교수는 "뇌전증 환자가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는 것은 흔한 증상"이라며 "그러나 뇌전증 발작 후에는 대개 의식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A씨의 경우처럼 운전까지 지속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이어 박광우 교수는 "극히 드물긴 해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실을 정확히 밝히려면 사고 당시 A씨의 뇌파를 살펴봐야 하는데, CCTV 영상만으로는 판단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뇌전증 환자 운전에 관한 '가이드라인' 필요해
현재 법적으로 뇌전증 환자는 면허를 취득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면허 취득 당시 뇌전증 발병 사실을 숨긴다면 사실상 취득이 가능해진다. 이미 면허를 취득한 뇌전증 환자가 운전해선 안 된다는 규제도 없다. 특히 잦은 발작을 일으키거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는 뇌전증 환자, 혹은 치료를 받더라도 조절되지 않는 뇌전증 환자의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으므로 이런 환자의 운전에 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져야 할 필요성이 보인다.

다만, 꾸준한 치료로 발작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환자에게 무조건 운전을 금지하기도 어렵다. 뇌전증 환자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잘 관리하면 일반인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다. 실제 뇌전증 환자의 교통사고 발생률이 일반인에 비해 크게 높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박광우 교수는 "뇌전증 환자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며 "뇌전증 전조증상을 느끼는 환자는 최대한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하고,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도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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