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없어서…” 세 살 아이한테 성인 약 갈아 먹이는 부모들

입력 2025.03.27 07:53

[소아 무약촌(無藥村)]① 어린이 약, 한국만 ‘못’ 나오는 사정


인근에 약국이 없는 지역을 흔히 ‘무약촌(無藥村)’이라고 합니다. 한자를 직역하면 ‘약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선 많은 아이들이 무약촌에 살고 있습니다. 약국이 없어서만은 아닙니다. 약이 개발되지 않았거나, 개발은 됐지만 허가·급여적용이 안 돼서, 공급이 중단돼서 등 여러 이유가 얽혀 있습니다. [소아 무약촌]은 국내 소아의약품 부족 문제를 살피고,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해 알아볼 예정입니다. 아픈데 약이 없는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 그런 아이들을 치료하는 의사의 이야기도 전합니다. (편집자 주)
아이와 약
사진 = 클립아트코리아
#사례1. 알림 문자
지방에서 소아청소년과의원을 운영 중인 A원장은 아침마다 비슷한 문자를 받는다. 오늘은 어떤 약이 없는지 알려주는 약국의 ‘품절 알림’ 문자다. 감기약부터 소화제, 천식 약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문자를 거의 매일 받고 있다.

#사례2. 있어도 없는 약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근무 중인 B교수는 오늘 오전에도 소아암 환자 보호자에게 ‘약 수입 방법’에 대해 안내했다. 필요한 약이지만 국내에는 없어, 보호자가 직접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약을 구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시가 급한 환자에게 ‘길게는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분명 있는 약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없으니, ‘있어도 없는 약’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소아청소년과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소아청소년을 위한 약(藥) 역시 태부족이다. 실제 국내 소아청소년과 의사라면 위 사례 같은 일들을 한 번쯤, 혹은 수시로 겪는다. ‘약이 없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옛날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부작용 위험 알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오프라벨’ 처방
지난해 말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소아질환 분야 주요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7월부터 2020년 6월까지 국내 소아중환자실에서 24시간 이상 입원 치료를 받은 소아 환자 502명(평균 나이 1.7세) 중 99.6%(500명)가 1회 이상 ‘오프라벨(Off label)’ 처방을 받았다. 오프라벨 처방이란 의약품을 적응증, 연령, 용량 등 허가사항 이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보고서를 보면, 소아 중환자에게 오프라벨로 많이 사용된 약에 강력한 진통제이자 전신마취제인 ‘레미펜타닐’이나, 위산 억제제 ‘에소메프라졸’, 진정제 ‘미다졸람’ 등도 있었다.

더 주목할 점은 ‘부작용’이다. 어떤 형태로든 의약품을 오프라벨로 사용한 후 총 67건의 부작용이 보고됐는데, 47건(61.7%)이 오프라벨 사용과 관련이 있었다. 이 중엔 ▲저혈압 ▲백혈구 감소증 ▲호중구 감소증 ▲혈소판 감소증 ▲간 수치 상승과 같은 중증 부작용도 포함됐다.

두 살도 안 된 아기에게 부작용 위험까지 감수하며 어른 약을 쓰는 이유는 ‘약이 없어서’다. 연구 결과를 볼 것도 없이,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가정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중증 질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기처럼 비교적 경증에 속하는 질환도 치료에 필요한 약이 품절되기 일쑤다. 2023년 대한아동병원협회(현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가 44개 아동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41개 소아청소년 필수의약품 또한 길게는 1년 이상 수시 품절 상태였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게 일선 의사들의 설명이다.

문자 화면 캡처
약 품절을 알리는 문자.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 최용재 회장(의정부튼튼어린이병원장)은 “매일 이런 문자를 받는다”고 했다. / 최용재 회장 제공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 최용재 회장(의정부튼튼어린이병원장)은 “소아 감기와 천식 치료에 필수적인 진해거담제·기관지확장제의 경우, 품절이 지속돼 보호자가 직접 성인 약을 갈아서 먹이다가 아이가 울고 토하는 일이 빈번하다”며 “소아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공급되는 극소량의 특수제제 약물들의 경우 부족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보호자들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12세 희귀질환 환아의 어머니 이 모(47)씨는 “외국에 있는 약이 국내엔 들어오지 않아서 증상을 조절하는 약만 쓰며 버티고 있다”며 “부작용이 20개가 넘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 그 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경기도에서 3세 여아를 키우고 있는 김 모(35)씨 또한 “시럽 약이 없다고 해서 시중에 판매하는 액상 비타민에 가루약을 섞어서 먹이기도 했다”며 “소아과 가기도 힘든데, 약을 구하는 건 더 힘들다”고 했다.

◇소아 대상 임상 난항… 개발돼도 급여 관문 넘기 힘들어
소아의약품이 부족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기본적으로 개발 자체가 쉽지 않다. 약을 개발하려면 임상시험을 해야 하는데, 소아를 대상으로 한 임상의 위험성과 이에 따른 부정적 시각으로 인해 환자 모집이 어렵다. 성인에 비해 환자 수 또한 적다보니, 시장성이 낮아 제약사도 선뜻 개발하려들지 않는다. 실제 최근 5년(2019~2023년) 간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시험계획 승인 현황을 보면, 소아를 대상으로 한 임상은 전체 임상의 3% 수준에 불과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특정 약을 개발할 때 소아 임상시험을 의무화하거나, 소아약 개발 기업에 개발 후 일정 기간 시장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 아동건강인간발달연구소, 유럽 임상시험센터네트워크, 일본 소아연구네트워크 등 관련 연구소·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지원도 활발하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소아약 개발에 필요한 안내서나 임상 가이드라인만 있을 뿐, 개발을 의무화하거나 개발 기업에 혜택을 주는 제도는 전무한 상태다. 전체 R&D(연구·개발) 투자에서 소아 관련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적다. 제약산업전략연구원 정윤택 원장은 “기업 입장에서 특허 기간 6개월 연장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미국 기업들이 소아약 개발에 적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라며 “반면 우리나라는 소아약 개발에 대한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보니, 기업들이 개발을 주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2019~2023년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시험계획 승인 현황 / 그래픽 = 김민선
‘그럼 해외에서 개발한 약을 들여오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이 역시 쉽지 않다. 국내에 도입하려고 해도, 소아약 특성상 건강보험 등재에 필요한 임상적 근거가 부족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에서 소아약 급여 좌절 경험이 있는 A제약사 관계자는 “비용효과성 등을 입증할만한 임상적 근거가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등재가 지연되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주 쓰는 소아 진통소염제나 호흡기질환 약 등의 품절 문제는 국내 약가 구조와도 연관돼 있다. 한국은 약가 결정권을 절대적으로 국가가 쥐고 있는 데다, 소아 진통소염제·호흡기질환 약처럼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약, 오래된 약은 가격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이 낮은 수익성을 감수하고 약을 계속 생산·공급할 리 만무하다. 동덕여대 약학대학 유승래 교수는 “약가를 계속 내리다 보니, 소아가 많이 쓰는 약임에도 기업들이 생산을 잠정, 또는 완전히 중단하는 일이 벌어진다”며 “도의적 차원에서 생산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채산성이 낮다면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아, 작은 성인 아냐… 전용 치료제 절실”
2023년 심평원 학술지에 실린 ‘소아청소년 복합만성질환자 수·진료비 변화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20세 미만 소아청소년 복합만성질환자 수는 2011년 34만5000명에서 2021년 45만1000명까지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20세 미만 인구 수는 1135만명에서 846만명으로 연 평균 2.9% 감소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들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데, 아픈 아이들은 계속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국내 소아약 개발·도입이 시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아 환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처방할 약이 없다면, 지금처럼 치료를 못 받거나 불가피하게 성인 약을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직접 해외에서 약을 ​들여오려면 수백~수천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이로 인해 소아 질환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성장 후 만성질환으로 진행되면, 개인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20세 미만 인구 수 대비 소아청소년 복합만성질환자 비율 / 그래픽 = 김민선
소아와 성인은 생리적 특성이나 적합한 용량·용법이 모두 다르다. 성인 약을 그대로 사용할 경우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체내에서 비정상적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성인에 존재하지 않는 질환이 소아에만 존재할 수 있고, 같은 질환이 소아에게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정윤 교수는 “암(癌)만 해도 소아는 성인과 전혀 다른 종류의 암이 발생한다”며 “감염성 질환이나 선천성 질환, 유전 질환 또한 성인보다 소아에서 더 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아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치료법도 성인과 다르기 때문에 소아용 약제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미리 보기>
②편에서는 실제 국내에 약이 들어오지 않아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소아희귀질환 환자 보호자(어머니)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어렵사리 진단을 받았던 그 날의 기억부터, 같은 질환을 앓았던 다른 아이의 장례식에 갔던 일, 약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현재 상황 등 여러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