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일까, 식후일까? 약 봉투를 집어 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다. 하루 몇 번 먹어야 하는 약이든 식사를 기준으로 하면 복용 시간을 기억하기에 편리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약과 음식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음식과 약은 다르다.
몸의 입장에서 보면 둘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음식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 몸은 남는 음식을 저장해두려고 애쓴다. 이때 저장하는 형태는 지방이다. 지방은 같은 무게당 칼로리를 제일 많이 담고 있는 고밀도 에너지원이다. 몸을 움직이고 이동할 때 부담이 제일 적다. 인체가 단백질이든 탄수화물이든 남는 족족 모두 지방으로 바꾸어 저장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몸은 음식에서 얻는 에너지를 비축하고 싶어 한다.
여러 종류의 약(사진 셔터스톡)
위, 장, 간을 거치며 약은 사멸한다
약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확 달라진다. 몸은 약을 만나는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없애버릴까 궁리한다. 물과 함께 삼킨 알약이 위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위산과 소화효소가 단백질을 분해한다. 당뇨병 환자들이 인슐린을 주사로 맞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면, 여기에 답이 있다. 인슐린은 단백질로 만들어진 약이라 위에서 받는 1단계 공격에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바이오 의약품으로 불리는 생물학적 제제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기본적으로 단백질이다 보니 위산과 효소의 공격에 잘게 쪼개져 힘을 잃고 만다. 페니실린 같은 일부 항생제도 위산 공격에 취약하다. 바이오의약품처럼 무력화되진 않지만, 그래도 상당한 분량이 위산에 파괴된다. 약이 위산과 접촉하는 시간을 줄여줘야 변형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페니실린을 식사 1시간 전이나 식후 2시간에 복용하는 게 중요하다. 공복에는 위에 머무는 시간이 비교적 짧아 위산과 덜 부딪치기 때문이다.
약에 대한 몸의 공격은 장에서도 계속된다. 장 상피세포에 내장된 약물분해효소가 약을 거칠게 몰아세운다. 어떤 약물은 이 단계에서 90%가 파괴된다(자몽주스는 바로 이 효소를 방해한다. 스타틴 같은 약을 복용 할 때 자몽주스를 마시면 혈중 농도가 여러 배 증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까스로 몸속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장에서 흡수된 약은 문맥이라는 혈관을 거쳐 간으로 직행한다. 문맥은 영어로 포털 베인(portal vein)인데, 장에서 흡수된 약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뜻이다. 인터넷에 접속할 때 누구나 거쳐 가는 네이버, 다음 같은 웹사이트를 포털사이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간은 만만치 않은 관문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화학적 처리 과정을 통해 몸에서 약을 제거하기 쉬운 형태로 바꾼다.
어떻게든 남아보려 애쓰던 약들도 이제는 끝이다. 간의 대사과정을 거친 약은 분리 수거된다. 일부는 담즙을 통해 대변으로 배설되고, 일부는 신장을 거쳐 소변으로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약은 몸에서 사라진다. 몸은 약이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는 듯이 한껏 자존심을 세운다.
약의 다양한 생존전략
약마다 어떤 약은 하루에 한 번으로 충분하지만, 어떤 약은 하루에 서너 번을 복용해야 한다. 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약을 내쫓으니 그때마다 다시 약을 보충해주어야 약효가 유지되는 것이다. 쉽게 쫓겨나는 약일수록 매일 여러 차례 복용해주어야 한다. 약의 입장에서는 몸의 이런 차별 대우가 억울하다. 몸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조력자를 자처하며 들어온 약인데, 음식은 잡아두려 하면서 약은 얼른 짐 싸서 나가라니 섭섭할 것이다. 하지만 기왕 좋은 일을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맘을 다잡고 몸에 오래 머무를 방법을 찾는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서방형 제제이다. 특별히 설계한 알약 속에서 약 성분이 서서히 방출되도록 하여 약효가 더 오랜 시간 지속되도록 한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퇴짜를 맞을 바에야 조금씩 들여보내서 오랫동안 시간을 끌어보자는 전략이다. 서방형 제제는 특수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쪼개거나 갈면 구조가 망가져서 약 성분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되면 약의 지연 전략이 위험에 처한다.
음식이 얄밉게 약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음식 속의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이 약 성분과 결합해서 약이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간혹 우유나 유제품을 약과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주의를 듣게 되는데, 음식이 약의 흡수를 방해하는 경우이다. 다행히 이런 경우는 일부에 제한되고, 다른 대부분의 약은 음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1일 3회 식후’ 약 복용이 일반적인 이유
약 봉투 앞면에는 ‘1일 3회 식후’라는 표시가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식사 간격은 매번 동일하지 않다. 보통 아침은 오전 7시, 점심은 정오, 저녁은 오후 6시에 먹는다면 아침과 점심은 5시간, 점심과 저녁은 6시간, 다시 저녁과 아침 사이에는 무려 13시간의 간격이 놓인다. 음식에서 얻는 거대 영양소의 경우 이런 불규칙한 시간 간격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탄수화물과 지방은 몸에서 적극적으로 저장하고 꺼내 쓰는 물질로서 혈중 수치를 일정한 패턴으로 유지할 수 있다. 약의 경우는 다르다. 기름에 잘 녹아서 피하지방에 머무를 수 있는 일부 약물을 빼면, 일반적인 약에는 혈중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저장고가 없다. 몸속 약의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시간 간격을 똑같이 나눠주는 방법이 이상적이다. 8시간마다 맞춰서 복용하는 게 삼시 세 끼에 맞춰 복용하는 것보다 정확한 약 복용법이란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시간을 맞추는 약은 많지 않다. 우리 몸이 그렇듯, 우리 역시 약을 홀대하긴 마찬가지라서, 약을 중심으로 시간을 맞추다 보면 복용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규칙성 있는 습관이 될 수 있도록 기준을 식사에 맞춘다. 다행히 대부분의 약은 약간의 융통성이 있어서 약의 혈중 농도가 위아래로 어느 정도 변화되더라도 두루뭉술하게 약효를 유지한다. 덕분에 8시간마다 복용하지 않고 하루 세 번 복용해도 큰 문제가 없다.
까칠하게 약을 밀어내는 몸에 비하면 약은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마지막 반전이 있다. 약은 정말 독이 될 때가 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약이 몸 안으로 들이닥치는 경우다. 이때는 약이 몸을 공격한다. 위와 장, 간과 신장의 모든 방어 장비를 동원해도 쏟아져 들어오는 약을 막을 수 없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몸은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고 만다. 몸이 그토록 약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평상시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아침에 약을 복용한 줄 모르고 또 한 번 복용하는 정도로 응급실에 가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진 않는다. 여러 약을 함께 복용 중일 때 약물 간 상호작용이나 또는 약과 음식, 약과 건강기능식품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약의 혈중 농도가 여러 배 증가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긴급사태를 대비해서, 자신이 복용 중인 약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지 의사, 약사와 미리 상담해두는 게 안전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약을 제때 맞춰 복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정재훈 약사(사진 셔터스톡)
/정재훈 과학,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약바로쓰기운동본부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