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남산에 가면 핫플레이스가 있다. 남산타워 앞 사랑의 자물쇠. 달달한 연애를 즐기는 커플들이 반드시 한 번은 들린다는 그곳. 그곳에 가면 연인 혹은 친구들은 자물쇠에 서로의 이름을 적고(이름 사이에 하트도 하나 그려서) 철조망이나 난관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그 열쇠를 아래로 던져버린다.(실제로 던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속으로는 ‘우리 사랑 영원히’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랑의 자물쇠는 남산타워 앞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보면 곳곳에 사랑의 자물쇠가 빼곡히 걸려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프랑스 센강에 있는 퐁 데자르 다리는 사랑의 자물쇠가 너무 많이 걸려서 다리 난관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까지 있었을 정도다. 실제로 남산에서도 빼곡한 자물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한다. 그깟 자물쇠가 뭐길래.
왜 수많은 커플들은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것일까? 열쇠가 없어진 자물쇠를 끊어내기 쉽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랑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실제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영원한 사랑을 자물쇠와 같은 실제 사물로 구체화하는 것이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다. 프로포즈를 할 때 필수품이 무엇인가? 바로 반지다. 그것도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반지. 물론 프로포즈용 반지에 다이아몬드가 필수품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유가 된다면 다이아몬드를 넣고 싶어 한다. 반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언약하고, 다이아몬드로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소망하면서.
사랑을 하고 있는 많은 연인들은 불안해한다. 상대방의 사랑이, 혹은 스스로의 사랑이 변할까봐.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여’라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를 의심하지 말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 불안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이 있다. 번역해보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이고, 좀 더 편한 말로 의역해 보자면 ‘보이는 것만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존한다고 생각한다. 공기가 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실감하지 못한다.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언론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 눈에 기후변화의 증상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이 된다.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고,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표현될 때 사랑을 실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보는 행위 자체가 항상 믿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선수들이 농구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 횟수를 세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영상 속 공에 집중하며 열심히 실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상 속에서 한 마리의 고릴라(정확하게는 고릴라 탈을 쓴 사람)가 유유히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그것도 한 가운데에서 가슴을 치며 포효하는 동작까지 취한다. 그런데 농구공에 집중하고 있는 참가자 중 대다수는 그 포효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내 눈앞에 고릴라가 분명히 있어도 내가 그 고릴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봐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음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하지만 무주의 맹시는 정반대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있어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냐고. 내 앞에 무엇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기대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면 굳이 그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는 것은 아니냐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토로한다.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없을까?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자. 당신이 마음을 연다면 지금 당신을 아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도 있다. 그깟 자물쇠가 없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닐테니.
사실 사랑의 자물쇠는 남산타워 앞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보면 곳곳에 사랑의 자물쇠가 빼곡히 걸려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프랑스 센강에 있는 퐁 데자르 다리는 사랑의 자물쇠가 너무 많이 걸려서 다리 난관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까지 있었을 정도다. 실제로 남산에서도 빼곡한 자물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한다. 그깟 자물쇠가 뭐길래.
왜 수많은 커플들은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것일까? 열쇠가 없어진 자물쇠를 끊어내기 쉽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랑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실제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영원한 사랑을 자물쇠와 같은 실제 사물로 구체화하는 것이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다. 프로포즈를 할 때 필수품이 무엇인가? 바로 반지다. 그것도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반지. 물론 프로포즈용 반지에 다이아몬드가 필수품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유가 된다면 다이아몬드를 넣고 싶어 한다. 반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언약하고, 다이아몬드로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소망하면서.
사랑을 하고 있는 많은 연인들은 불안해한다. 상대방의 사랑이, 혹은 스스로의 사랑이 변할까봐.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여’라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를 의심하지 말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 불안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이 있다. 번역해보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이고, 좀 더 편한 말로 의역해 보자면 ‘보이는 것만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존한다고 생각한다. 공기가 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실감하지 못한다.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언론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 눈에 기후변화의 증상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이 된다.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고,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표현될 때 사랑을 실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보는 행위 자체가 항상 믿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선수들이 농구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 횟수를 세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영상 속 공에 집중하며 열심히 실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상 속에서 한 마리의 고릴라(정확하게는 고릴라 탈을 쓴 사람)가 유유히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그것도 한 가운데에서 가슴을 치며 포효하는 동작까지 취한다. 그런데 농구공에 집중하고 있는 참가자 중 대다수는 그 포효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내 눈앞에 고릴라가 분명히 있어도 내가 그 고릴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봐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음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하지만 무주의 맹시는 정반대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있어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냐고. 내 앞에 무엇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기대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면 굳이 그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는 것은 아니냐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토로한다.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없을까?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자. 당신이 마음을 연다면 지금 당신을 아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도 있다. 그깟 자물쇠가 없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닐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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