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습관적 지각러’인가요?

입력 2025.02.10 08:52

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남성이 시계를 보며 뛰는 모습
사진 = 클립아트코리아
A: “어디야?”
B: “지금 출발해~”
A: “응? 그럼 난 만화 가게에 있을게~”

핸드폰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 대학 시절의 일이다. 친구와 오후 3시에 만나서 함께 전자상가에 가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15분이나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 연락할 방법도 없어서 발을 구르다가, 혹시나 해서 친구네 집에 전화를 했더니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 내 친구. 그 친구의 집은 버스로도 30분 이상 걸리는 곳에 있었음에도 어떤 침대 같은 편안함이란. 그런데 내 기억에 나도 아무렇지 않게 만화를 보며 친구를 기다렸다. 아직은 시간적으로 여유 있었던 대학생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겠다. 만약에 직장 동료가 이와 같은 말을 했다면? 하하, 상상하기도 싫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존재하는 빌런들이 있는데,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좋은 일이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인데, 그 예측되는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지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우선, 전략적으로 지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협상할 때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협상장에 늦게 나타난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이트할 때 일부러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나는 썸남 혹은 썸녀도 있다. 이 경우는 지각을 통해 상황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거나, 타인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본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에 근거해서 설명하자면, 약속 장소에 늦게 나오는 사람은 그럴 만해서, 즉 더 영향력이 있거나, 더 중요한 사람이거나, 현재 상황에 더 통제력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게 될 수 있다.

심리적 회피 동기도 지각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직장 내 구성원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조직 심리학 영역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조직에 대한 불만족, 낮은 동기, 또는 스트레스와 같은 요인들이 직장이라는 공간을 회피하도록 만들고, 이런 심리적 요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출근 시간을 늦추게 한다.

간혹 협업을 하다 보면 꼭 마감 시한을 넘기는 지각러(지각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신조어)들도 있다. 이들은 마감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을 때에는 일에 효율을 못 내다가도, 마감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효율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현재 편향(Present Bias)’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즉각적인 보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마감이 멀었을 때는 긴장감이 부족해 효율이 떨어지지만, 보상이 지급되는 마감이 가까워지면 직무에 대한 동기가 강화된다.

그런데 이런 경향성이 모든 사람에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마감 시간 즈음에 일의 효율이 감소하기도 한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수록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된다. 뇌과학에서는 COMT(Catechol-O-Methyltransferase) 유전자 변이가 사람들의 마감 기한에 대한 반응을 다르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Val158 대립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더 높은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마감 기한 직전에 더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은 반면, Met158 대립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평소에도 높은 도파민 수준을 유지하며 계획적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양한 이유로 지각을 하지만, 결국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계획된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습관적 지각을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계획 오류는 사람들이 특정 작업이나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자원을 과소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다. 이 유명한 건물은 본래 계획에 비해 시간은 10년, 건설비용은 10배가 더 필요했다고 한다. 계획 오류는 주변에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1주일이면 중간고사 준비가 완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F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약속 시간까지 도착하려면 집에서 8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자신이 외출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예측할 때 계획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그는 습관적 지각러가 될 수밖에.

지각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도 제안된다. 지각이 허용되지 않는 명확한 규칙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거나, 지각이 발생할 때마다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거나, 정시 도착을 장려하는 보상 시스템을 제공하는 방법들이 효과가 있다. 지속적인 시간 관리 기술을 교육시키는 것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들이 습관적 지각러들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지각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손해보게 만드는 이기적인 행동이며,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행동이다. 만약 당신의 지각을 용인해 주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해보자. 지각하는 사람에 대한 가장 쉬운 선택인 ‘손절’을 마다하고 여전히 당신의 지각을 감내해주는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을 배신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