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 습격… 변화무쌍한 날씨가 불안·무기력 불러온다 [건강해지구]

입력 2023.01.27 22:00

대한민국 기후 불안 현주소

한파
한파 등 기상 이변이 잦아지며 일상 속에서 불안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에 기후변화 역시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 영하 4.2도. 1973년 기상관측 이래 평균기온이 가장 낮았던 지난달 14~26일, 아파트·주상복합 관리자들이 모인 카페는 시설물 동파 걱정으로 불안에 떨었다. 입주민에게 방송으로 공지할 주의사항을 공유하는 글엔 ‘세탁기가 얼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전화가 벌써 오는 데 큰일이다’ ‘근무지 동파 걱정에 편히 쉬질 못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23도까지 내려갔던 25일엔 ‘설 연휴면 뭐하나, 근무지에 수시로 가서 동파한 곳이 있나 없나 체크하고 있다’는 하소연도 있었다.

# 업무 외 일상생활도 얼어붙었다. 강추위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는 일이 잦아 외출이 쉽지 않은 탓이다. ‘보험사를 불러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한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차 시동을 끄자마자 도로 방전됐다’ ‘보험사 긴급출동을 호출해도 한파로 출동량이 많아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른다더라’는 후기가 속출했다. 바깥 활동을 하기 어려운 날씨에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간만에 시간이 나도 날씨 때문에 바깥을 돌아다니질 못하니 무기력하다’ ‘추위로 산책을 못 한지 오래 돼 강아지가 우울해하는 걸 보니 속상하다’는 것이었다.

최근 잦은 강추위는 북극의 온난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기후변화는 직업 활동과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상 이변에 불안해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많다. 지난 6월 세계보건기구(WHO) 기후변화에 대응할 정신건강 지원 체계 구축을 촉구하는 정책브리핑을 발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후변화 스트레스가 한국에선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기후변화 탓에 일상에 찾아온 변화… 불안·무력감↑
기후변화는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헌정 교수는 “한파나 폭우 등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자주 반복되는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신건강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요인에 타격을 입힘으로써 간접적인 악영향도 미친다. 재단법인 숲과 나눔 보고서에 따르면 집중호우 일수가 늘수록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의 근무 일수가 줄어든다. 2020년 ‘기후위기로 인한 인권침해 증언대회’에서, 인천의 건설노동자 이상범씨가 “올여름 50일 넘게 이어진 긴 장마로 일을 3주밖에 하지 못했다”며 “비가 와서 돈을 못 받고 퇴근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경제적 불안이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건 널리 알려진 바다.

기후변화에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편차가 크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자식이 있거나 출산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비극을 경험한 빈도수가 많은 사람일수록 기후변화에 위기감을 잘 느낀다”며 “이런 사람들은 불안을 덜기 위해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 기후위기 대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맘카페엔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환경에 관심이 생겨 기후행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한계를 실감했단 회원들이 많다. ‘나 혼자 에너지 소비량을 줄인대서 이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게시글엔 ‘분리수거 열심히 해도 한계가 느껴진다’ ‘사회가 동참하지 않아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된다’는 걱정이 잇따른다. 곽금주 교수는 “개인이 발버둥치는데도 주변인과 사회가 변화하지 않으면, 기후변화가 ‘내 일’이라 생각해 행동하던 사람들이 자포자기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기후변화 대응은 개인 정신건강에도 중요… 관련 연구 확대돼야 
기후변화는 사회적 문제고, 정신건강은 개인 문제이기만 할까. 이 둘이 사실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게 최근 조명되고 있다. 우울증을 전공한 동국대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사공정규 교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면, 그의 정신과 심리가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하다”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진료실 너머의 사회 현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환자의 불안과 우울을 치유할 수 있는 시대”라고 말했다. 비극의 선례는 호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 들어 호주에선 가뭄과 정신건강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가 여럿 발표됐다. 기후변화로 오래 지속된 가뭄이 호주시골 지역 거주자들에게 큰 심리적 고통을 유발했고, 시골 지역의 사회·경제적 불리함이 가뭄으로 인한 고통을 증폭시켰으며, 시골에 거주하는 남성 집단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율이 증가했단 내용이다.

해외에선 기후변화와 정신심리 건강 간 고리를 잇는 일이 한창이다. 기후 슬픔(climate grief), 생태 불안(ecological anxiety)이란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다. 한국은 작년에도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를 할 정도로 사회 불안도가 높지만, 기후변화가 국민의 정신건강에 미칠 타격엔 대비돼있지 않다. 곽금주 교수는 “미국 코넬대학교엔 ‘환경심리학’이란 전공이 있을 정도로 관련 분야 연구가 활발하지만, 국내에선 이 분야가 여전히 생소하고 전공자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방문교수를 지낸 사공 교수 역시 “국내 정신건강의학계엔 기후변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연구자가 아직 없다”며 “미국은 환자를 진료하는 교수와 연구에 전념하는 교수가 나누어져 있지만, 한국은 교수들의 환자 진료부담이 커 새로운 분야에 파고들 여력이 부족한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후변화’를 다루는 현재의 방식이 정신건강 증진과 위기 극복에 도움되지 않는단 의견도 있었다. 사공정규 교수는 “현재 기후변화와 정신건강 관련 보도는 기후변화가 정신건강에 가져올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다루는 데만 집중한다”며 “그러나 기후변화를 극복했을 때 우리가 더 단단해질 것이란 ‘외상 후 성장’에 대한 논의가 위기 극복엔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곽금주 교수는 “대중에 ’분리수거를 해라’ ‘난방온도를 낮추라’고 무작정 권하기보단, ‘특정 행동을 실천하면 기후재앙까지 남은 시간을 얼마간 늘릴 수 있다’는 식으로 소통해야 한다”며 “개인의 행동이 환경 회복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관한 연구와 보도가 이뤄져야, 기후행동에 나선 사람들의 의지를 지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레온가스(염화불화탄소) 규제를 위한 ‘몬트리올 의정서’가 발효된 지 33년 만에 지구 대기권의 오존층이 뚜렷하게 회복되기 시작했단 세계기상기구(WMO) 보고서가 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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