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약을 왼쪽으로 누워서 넣어야 하는 이유

입력 2016.01.26 10:31

약의 사용 방법은 참 복잡하다. 관장약 사용설명서를 보자. ‘왼편으로 누운 자세에서 투여하라’는 지시가 있다. 오른편으로 누워서 투여하면 안 될까? 언뜻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캐나다의 한 약국에서 처음 인턴으로 일하던 어느 날, 눕는 방향을 바꿔도 괜찮은지 묻는 환자의 질문에 상관없으니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편한 쪽으로 누워도 된다고 답한 적이 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매니저가 얼른 내 말을 바로잡았다. 관장약은 설명서의 지시사항대로 왼편으로 눕는 게 좋다고 했다.

이유는 항문에서부터 직장, 다시 결장으로 이어지는 장관의 방향이 왼쪽으로 굽어져 있어서, 관장약이 중력에 따라 위에서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려면 약을 주입할 때 왼쪽으로 누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염에 사용하는 관장약은 되도록 오랫동안 장속에 유지되도록 해야 약효를 낸다. 만약 내가 말한 대로 환자가 오른쪽으로 누운 채 관장약을 넣었다면 약을 주입하자마자 거꾸로 쏟아지는 느낌이었을 거다. 매니저가 중간에 나서서 정정해준 게 정말 다행이었다.(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어떤 질문이건 모를 때는 우선 모른다고 답한 다음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답하는 습관을 들였다.)

관장약은 왼쪽으로 누운 상태에서 넣어야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약 사용법, 뭐가 이리 복잡해?

귀에 염증이 있을 때 약을 넣는 방법도 나이에 따라 다르다. 귀의 입구에서 고막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세균이 감염되어 생기는 염증성 질환을 외이도염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귀에 항생제를 넣을 때 귓바퀴를 머리 위쪽으로 살짝 들어 올리면서 뒤로 가볍게 당겨주는 게 바람직하다. 귀의 입구에서 고막으로 이어지는 관이 아래로 눕힌 S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당겨서 통로를 곧게 펴주어야 약이 귓속 통로 전체에 걸쳐 고르게 도포되기 때문이다.(시험 삼아 귓바퀴를 잡고 뒤에서 위쪽으로 당겨보자. 귀속 통로가 팽팽하게 펴지는 게 느껴진다.) 반대로 세살 미만의 어린이는 귓속 통로의 방향이 위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귀를 아래쪽으로 당겨주면서 약을 넣어야 한다.

성인의 외이도(고막과 귀 입구의 연결 통로)는 S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서 귓바퀴를 살짝 당겨 올리면서 귀 약을 넣는 것이 좋다

귓속에 약을 넣을 때는 한 번에 두세방울을 떨어뜨려도 되지만, 눈에 안약을 넣어줄 때는 한 번에 한 방울이 좋다. 눈이 수용할 수 있는 눈물의 양에는 한계가 있어, 그 이상을 넣어주면 넘쳐버린다. 두 가지 안약을 사용하는 경우 최소한 5분 이상의 간격을 둬야 한다. 워낙 좁다란 공간인지라 한 번에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안약이 눈 밖으로 새어나가니 약이 낭비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곳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약효 떨어지기 때문이다. 안약을 떨어뜨리고 나면 입에서 약의 맛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눈과 코를 이어주는 관을 통해 약이 입안으로 흘러 내려가 혀로 맛보게 되는 것이다. 안약이 필요한 곳은 입이 아니라 눈이니, 약을 눈 주위에 잘 가둬두려면 안약을 떨어뜨린 뒤에 엄지와 검지로 눈가 안쪽과 코 사이를 약 2분간 눌러 비루관이라는 통로를 막아준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고 불평이 나올 법하다. 그렇다고 불쌍한 약을 탓하지는 말자. 약 사용 방법이 복잡한 이유는 따지고 보면 전부 몸 때문이다. 우리 신체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약을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것이다. 안약이나 귀약에 비하면 사용법이 단순해 보이는 먹는 약조차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또한 몸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복용하는 스타틴 계열 약은 대체로 저녁 식사 뒤에 복용하는 게 이상적이다. 우리 몸이 스스로 콜레스테롤을 만드는 시간대가 주로 밤중이기 때문이다. 약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우리 몸의 생리와 구조에 맞춘 용법에 따라야 한다. 

약은 우리 몸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약의 사용설명서는 눈과 귀와 간과 장의 모습에 따라 그린 그림과 같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먹는 약으로 우리 몸속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현대 의약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약의 발견은 종종 인체의 생리와 질환의 기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던져주었다. 예를 들어 인슐린의 발견은 당뇨병에 대해 이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당뇨병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은 1921년 여름, 토론토의 외과의사 프레더릭 밴팅이 인슐린을 찾아내면서부터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약으로 쓰인 인슐린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인슐린을 작용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인슐린을 발견하고서 26년이 지난 1949년에야 마침내 인슐린이 혈당을 세포 속으로 밀어넣는 문의 열쇠와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슐린이 당뇨병 치료제로 먼저 개발되고 나서야 당뇨병 환자의 몸속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분과 세로토닌의 관계도 좋은 예다. 우울증은 신체적 원인에 의한 생물학적 질환일까, 아니면 사회심리학적 문제일까?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학자들 간에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힘이 한쪽으로 쏠린 것은 1987년 우울증 치료약 프로작이 출시되면서부터다. 프로작은 뇌 속의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에만 선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약이다. 세로토닌을 끌어올려 주는 약이 우울증에 효과 있다는 것은 불안하고, 거꾸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세로토닌이 모자란 탓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로써 우울증은 뇌 속 화학물질의 문제이니, 약물의 도움으로 균형을 잡아주면 부정적 감정은 줄어들고 기분이 좋아져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에 힘이 더해졌다. 이전에는 우울증이 환자의 성격 탓으로 치부되었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마치 성격 파탄자인 것처럼 보는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우울증을 뇌의 화학적 문제로 인한 질환으로 바라보게 되자 대중의 인식도 바뀌었다. 금기시되던 우울증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우울증이 없는데도 일상의 기분 변화와 삶의 문제를 항우울제로 해결하려는 사람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질환을 선명하게 그리려면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질환에 대한 그림은 흐릿한 것이 많다. 같은 병명의 질환이지만 사람마다 그림의 모습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그림이 더 선명해질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때로는 새로운 약의 발견이 질병과 몸의 그림을 더 선명하게 할 것이고, 때로는 선명해진 그림 덕분에 새로운 약이 발견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 도와가며 약과 현대의학이 더 많은 환자의 삶을 구할 수 있기 바란다.

정재훈

과학,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약바로쓰기운동본부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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