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건강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세월이 쌓여 갈수록 늙음은 점점 기세등등해진다. 사람의 각 장기(臟器)들도 세월의 축적에 따라 그 항상성이 점차 줄어들고, 쇠퇴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된다. 항상성이란 ‘여러 가지 환경 변화에 대응해 생명 현상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을 말한다. 나이 들수록 쇠하고 사그라지는 항상성은 질병과 기능이상 및 약물 부작용으로 더 흔들리고, 생리적 능력이 감소하면서 여러 질병을 일으킨다.
이렇게 생긴 질병은 ‘질병 다발성’으로 이어진다. 질병 다발성이란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질환을 함께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질병에 걸리다가 어떤 병은 낫고, 어떤 병은 만성화돼 지속되기도 하고, 만성질환은 급성질환이나 기능장애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질병을 쌓는다. 세월은 이렇게 질병을 쌓고, 늙음은 질병의 다발성이며, 결국 노인은 ‘과거 질환의 축적’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더해지는 경제적 어려움과 가정 및 사회에서의 역할 상실은 노인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아래 시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중략)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안에서
우물거릴 뿐

그러나 이러한 읊조림도 단 하나의 표현일 뿐, 어느 누구도 ‘늙음’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표현할 재간이 없다. 혹자는 한 문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월이 쌓이며 조직과 장기가 변화하여 일어나는 대체적으로 현저한 급성장애를 일으키지 않는 해부학적, 생리학적 변화’라고 의기양양하게 늙음을 정의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통계학적 수사일 뿐이다. 늙음은 현상이기도 하지만 과정을 이르는 말이기도 한 까닭에, 늙음은 머무르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근육질량의 소실, 렌즈의 혼탁, 균형유지 능력 감소, 사고 속도의 저하 등과 같은 변화를 ‘보통 늙음’ 또는 ‘평범한 늙음’이라 한다. 이에 맞대어 ‘성공한 늙음’ 또는 ‘힘찬 늙음’은 나이에 따른 생리적 변화가 최소한인 늙음을 가리킨다.
좀 더 살펴보면 늙음은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얼마나 망가졌는가?’로 결과된 결손을 들추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 있는 부분이 꽤 남아 있지 않은가?’로 남아 있는 쓸 만한 기능의 유용성을 추스르는 것이다. 전자가 노쇠의 개념이고, 후자가 성공한 늙음의 시각이다. 즉, 성공한 늙음은 노쇠의 최소화다. 그렇다.
노쇠는 성공한 늙음과 같고, 성공한 늙음은 노쇠와 동의어다. 다만 표현만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늙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기준은 없다. 질병 건강에 주 관심이 있는 의사들은 건강이 성공한 늙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인본주의자들은 대개 야망 실현, 봉사 구현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이처럼 명쾌한 구별법이 없다 보니 ‘어떠한 내부적인 감각도 우리에게 노화로 인한 쇠퇴 현상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질병과 노화를 구별지어 주는 특성 중의 하나다.
그런데도 늙음을 질병이라 우기는 이가 있다. 개중에는 아예 ‘늙음은 질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늙음 자체를 막아 젊음을 되돌려 주겠다는 항노화,노화방지의 ‘질병 장사’를 벌이는 이들도 있다. 이는 삶을 의학적 정상과 의학적 비정상으로만 이분화하여 그 대책을 의료의 몫으로 독차지하려는 의도다.
(중략)
사람들은 회복이 가능한 병과 회복이
불가능한 노화를 은근히 혼동하고
싶어 한다
위 작품을 보면 병은 자기 존재를 예고해 준다. 병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보다 아픈 당사자에게 더욱 명백하게 존재한다. 반면 노화는 당사자에게보다 남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화는 생리적 균형의 새로운 상태이다.늙음과 노인병은 분명히 다르다. 늙음이 질병과 다른 점은 비가역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제까지 비가역적이라 여기던 것이 연구를 비롯한 여러 방편에 의해 가역적인 것으로 판명되면 그때부터 그것은 이미 늙음이라 불리지 않는다. 아직도 늙음을 질병이라고 강변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이러한 늙음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지나친 또는 부차적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늙음과 질병은 다르며 늙음은 늙음이다’라는 사실을 다음 글을 통해 일깨우고 싶다.
(중략)
그대 가난하고 친구도 없이
동년배 중에 홀로 살아 남아서
하늘은 나이가 맞는 독한 고독에 맞설
애도의 역할을 점지해 준
그대의 마음 한구석에도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한 사랑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나니
투르게네프는 ‘노인’이라는 작품에서 질병과 가난한 외로움, 퇴행, 서러움 등 때문에 움츠려 위축될지라도 삶이 축적되면서 가져다 준 폭넓은 이해와 포용, 온화함을 선택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 그럴수록 더 현재에 순응하라고 권유한다. 이렇듯 성공한 늙음은 늙음을 거슬러 저항하는 항노화가 아니다. 나만의 늙음과 함께 가며 내가 다듬는 수정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둡고 괴로운 날들이 다가왔다.
나 자신의 병과 사랑하는 이들의 병,
노년의 추위와 어두움.
그대가 사랑한 것,
그대가 기약 없이 내맡긴 모든 것들이
시들어 스러져 간다.
이미 내리막길 어찌할 것인가.
슬퍼할 것인가? 서러워할 것인가?
어찌하든 그대는
나도 남도 구하지 못하리라.
구부러지고 말라빠진 노목의 나뭇잎은
점점 작아지고 성글어 가지만
그 푸름은 변하지 않는다.
그대도 몸을 움츠려 자기 자신 속으로
자기 회상 속으로 기어드는 게 좋다
그러면 저기, 깊이깊이 가다듬어진
마음속 맨 밑바닥에 그대의 옛 생활이,
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생활이,
아직도 생생한 푸르름과 어루만짐과
봄의 힘을 지니고 그대 앞을 비추리라.
그러나 명심하오! 가련한 노인이여.
희망을 갖지는 마시오!

유형준 교수
한림대강남성심병원 교수.
‘유담’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수필가로 활동한다.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함추문예회회장, 쉼표문학회 고문, 문학의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속에 담긴 건강 이야기를 고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