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중 상당수는 가족, 특히 배우자 몰래 가지고 있는 돈이 있다. 통상 ‘비상금’ 또는 ‘비밀자금’이라고 부르는데,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씀씀이를 위한 부분이다. 이 돈이 나 자신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를 포함한 친인척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효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은행(隱幸) 주머니’의 한계효용 가치
비상금을 가족여행 시 소소한 현금 지출이나 자녀의 용돈, 또는 부모님이나 처가 부모님 등 가까운 가족에게 활용해 보자. 그 효용은 말 그대로 상상 이상이다. 이를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계효용’이라는 경제 용어가 필요하다. 한계효용은 어떤 재화 또는 서비스의 추가분(증가 부분)으로부터 얻는 효용이다. 따라서 이 경우 ‘내가 쓰는 비상금으로부터 얻는 효용 또는 그로부터 생기는 만족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자녀에게 엄마가 용돈을 매주 5000원 주는 가정의 예를 보자. 이 경우라면, 아버지 또한 아내(어머니)에게서 매월 일정 금액의 용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의 용돈을 받는가는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아버지의 용돈도 그리 풍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과 함께 용돈을 받아서 써야 하는 입장인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따로 용돈 줄 형편은 못 되기 십상이다. ‘뭐, 얘들도 제 용돈을 받아서 쓰니까 내가 따로 줄 필요는 없지’ 하면서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올랐거나, 축구대회에서 한 골을 넣었거나, 태권도 승단심사를 통과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래 우리 아들(딸), 정말 잘 했구나” 하면서 한번 안아 주고 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지갑에서 5000원 또는 1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주는 게 좋을까? 이때 받는 5000원의 효용과 어머니에게 매주 받는 5000원의 효용이 같을까?
어머니에게 받는 용돈은 당연히 받는 돈으로, 이미 내 권리(?)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액수에서 다소 차이날 수 있지만 다른 아이들도 모두 받는 돈이 기도 해서 매번 받을 때마다 그다지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용돈받을 때가 되면 고맙기보다는 ‘이번에는 어떻게 잘 써서 모자라지 않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받은 과욋돈 5000원은 5만원짜리 한 장이 가지는 효과 이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아버지에게서 특별상(?)을 타기 위해 뭔가 잘 해야겠다는 의욕과 동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석이조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를 다루는 방법 또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대학에 다니는 손자 손녀에게 요즘 데이트 잘 하고 있느냐면서 5만원짜리 한두 장 손에 쥐어 주면 더없이 좋은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같은 비상금을 통상 ‘딴 주머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은행(隱幸) 주머니’라고 부른다. ‘은퇴(隱退) 후 행복(幸福)을 만들어 주는 주머니’라는 뜻이다. 은행 주머니를 부부가 서로 적당하게 차고 있으면 평소 삶은 물론, 특히 은퇴 후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은행 주머니 차기, 바로 지금 시작하자
그럼 ‘유리알 지갑’이라는 월급쟁이는 어떻게 딴 주머니를 찰 수 있을까. 또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앞서 언급한 교수들의 경우 이런 저런 회의나 세미나에 가서 거마비를 받는 경우도 있고, 프로젝트를 해서 과욋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이라고 해서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생활하다 보면 특별상여금, 명절 차례비 등이 나올 수도 있고 한 달 용돈을 조금씩 줄여서 모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커피 한 잔, 담배 한 갑, 술자리 한 번만 줄여도 10년, 20년 쌓이면 적잖은 돈이다.
은퇴할 때 나만의 은행 주머니가 있는 게 좋을까, 얼마나 있는 게 좋을까,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나름 답이 나올 것이다. 지난해 한 TV 프로그램에서 한 달 용돈 30만원, 즉 하루 1만원을 타서 사는 아버지(남편)의 초라한 인생을 본 적이 있다. 30년 안팎의 오랜 기간 동안 열심히 일한 아버지가 기껏 하루 1만원 인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한 가지는, 은행 주머니를 차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모른 척 눈감아 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남편이 딴 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엄한(?) 짓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즘같이 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래 살아야 하는 시대에 남편들도 나름 제 살길을 찾아야 한다. 또 아내들도 이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 슬쩍 눈감아 준 은행 주머니가 지금은 불편해도 은퇴 후 미래에는 더 큰 가치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어느 정도는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루 1만원 인생이 아니라 나만의 은행주머니를 차고 있는 즐거운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시작하자.
"남편이나 아내가 몰래 차고 있는 비자금 주머니를 때로는 눈감아 줄 필요가 있다. 비자금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여유가 행복한 은퇴 후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은행, 조선일보, 한화생명 경제연구원을 거쳤다.
올바른 은퇴설계를 돕기 위해 강연이나 방송무대에 종횡무진하고 있다. 현재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과 보험연구소장을 맡으면서 각종 은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하고 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월간헬스조선 11월호(146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