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따라다니는 고통, 성폭행의 그림자

입력 2009.11.17 09:51

성폭행은 신체적 고통을 넘어 피해자의 영혼마저 망가뜨린다. 대부분의 성폭행 피해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은 채 오랜 시간동안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죄 값을 받아야 하는 가해자는 쏙 빠져서 애초부터 가해자는 없던 상황처럼 모든 것이 피해자의 몫이 돼버린다. 바로 성폭행 피해자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트라우마)는 신체적인 손상 및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의 상황을 겪은 후 나타나는 증상이다.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개인차가 있으나 증상이 최소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해당한다. 감정 회피 또는 마비 증상, 분노와 피해의식, 수치심 등의 정신적 증상이 중심이지만 두통, 소화불량, 수전증 등의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성폭행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아동·청소년기에 성폭행을 당한 경우다. 인격과 자아에 대한 개념이 아직 확실히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충격은 성인에 비해 더 크다. 아동·청소년기의 어린 피해자들은 트라우마의 틀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자책하고, 분노한다. 또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공격적,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성폭행 트라우마는 증상 호전에 오랜 기간이 걸릴 뿐더러 완벽히 치유되지도 않는다. 슬픔과 자책, 원망과 분노의 감정들은 성장 후에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성폭행관련 뉴스를 보거나 등, 당시 기억을 떠올릴 만한 상황이라면 증상은 피해자의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올라오기 때문이다. 만약 성폭행을 당한 이후 트라우마로 인해 심각한 상태까지 이를 경우 경계성 인격 장애까지 나타날 수 있다. 정성훈 경북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실제로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들의 80%가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정서적 손상, 성폭행 등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반응과 행동이다. 가족의 반응과 행동이 치료과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치료가능, 완치 여부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 정성훈 교수는 “만일 자녀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이야기할 때 부모가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 화내는 행동을 취하면 아이는 그 일에 대해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 결국 ‘안전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전 환경은 성폭행 피해자인 자녀가 부모를 믿고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부모가 자녀의 성폭행 피해사실을 알고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것이 2차적 충격이다. 김태경 서울해바라기아동센터 임상심리 전문가는 “자녀들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부모'라는 큰 힘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보호받고 싶기 때문”이라며 “이야기를 듣고 부모가 크게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사건에 대해 자녀를 야단치면 자책하게 되고, 부모 간에 싸우는 등 가정불화의 모습을 보면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사건을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첫번째 치료며 가장 중요한 치료다. 또한 놀랐을 자녀의 마음을 달래며 자녀에게 잘못이 없음을 이야기 해 주고, 이야기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한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졌는지 상세히 파악하고 담당 전문가들을 만나야 한다. 범인 색출 및 검거를 원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트라우마 해소를 위해 전문가와 상담 및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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