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시작시간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전형적인 snowball Effect를 초래한다. Snowball Effect란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가속도가 붙으며 큰 규모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눈사람을 만들 때, 처음에는 손 안에 겨우 들어갈 작은 눈덩이를 계속 굴리다 보면 어느새 자기보다 더 큰 눈덩이가 되는데 이것을 비유한 경제용어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워렌버핏은 이자의 복리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snowball effect를 사용하였다.)
9시에 진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5분 늦게 시작하면 12시에 예약된 환자는 최소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게 된다. 즉 9시 예약환자는 5분만 기다리면 되지만 10시 예약환자는 10분, 11시 예약환자는 20분, 12시 예약환자는 30분 이상을 기다리게 된다. 의사의 진료수준에 따라 편차는 좀 있을 순 있지만 확실한 것은 대기시간이 최초 늦게 시작한 5분미만으로 줄어든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예약환자가 진료를 보러 오지 않는 예약부도가 있지 않는 이상 한두 환자와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면 그 시간이 고스란히 다음 환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더 심각한 것은 환자 당 진료시간이다. 대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진료시간을 줄이기 시작한다. ‘3분 진료’라고 일컫을 정도로 짧은 진료시간이지만 이 선마저 무너진다. 밀려 있는 환자 때문에 평균 3분 진료시간은 2분미만으로 줄어들기까지 한다. 물론 진료시간 짧은 것이 반드시 질적 저하로 연결되는 것을 아니겠지만, 결코 높은 진료수준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그러운 고객이라도 15분 정도가 기다리는 것의 한계라고 한다. 기다리는 환자는 이미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 불만을 의사 앞에선 내색하진 못 한다. 내가 아쉬우니까… 그렇지만 의사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사소한 자극이 주어지면 드디어 폭발을 하게 된다. 설명해 주는 간호사가 되었건, 수납하는 원무과 직원이 되었건, 주차장 직원이 되었건, 영문도 모른 채 직원들은 환자의 불만을 듣게 된다. 불만을 터트릴 사항도 아닌데 그것을 터트리니까 그 환자를 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우리 병원에 진상 환자가 많다고 이야기 한다.
대기로 인해 늦춰진 환자들에게 설명을 하다보면 점심시간은 이미 끝나 간다. 1시 예약환자는 벌써부터 와서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점심을 건너뛰기도 한다. 이는 비단 외래 간호사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약사나 방사선사 등 병원에 근무하든 모든 사람들이 특정 시간대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폭주하게 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된다.
환자는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진상환자 취급 받는다. 직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진상환자(?)에게 진이 빠지고 점심조차 건너뛰게 된다. 이 상황은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다. 물론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비약한 부분도 있겠지만 많은 대학병원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이 다음부터이다.
몇 몇 병원에서는 진료시작시간을 준수하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모은다. 일단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데이터 기반의 지표를 정의하고 실적을 집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특정한 시점에 결과를 공개한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야기는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느냐 등의 신뢰성 논쟁으로 옮겨간다.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더 입력시간으로 해야 한다.”, “오더 입력시간으로 하면 환자 진료시간까지 소요시간을 포함하므로 5분 정도는 빼 주어야 한다.”, “간호사에게 미리 말해서 오더를 입력하게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다 결국에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문인식장치를 도입해서 정확하게 측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정시 진료 이야기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이를 막는 시스템을 만들고 지각을 체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얼마나 웃기겠는가? 그러면서 정작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쏙 뺀다면, 특히, 병원에서 리더라 불리는 의사들이… 이건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임상과 차원에서의 회의가 늦게 끝나서 늦는 경우도 있고, 회진을 돌다 보니 혹은 수술이 다소 길어져서 늦어질 수도 있다. 갑자기 VIP가 찾아 와서, 진료 전 검사가 늦어져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의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일부러 늦게 오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의사는 일을 처리하는 것도 아닌데 한꺼번에 보는 게 좋다고 환자가 어느 정도 모이고 난 후에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근본적인 원인은 전문가로서 시간을 관리하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또한 권위는 자기가 지킨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신뢰를 쌓고 존경을 얻으면 세워지는 것이다.) 시간 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의사들은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바쁜 삶을 살고 있다고 첫 진료시작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정당화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은 습관하나가 미치는 효과는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크다. 특히, 그 사람이 조직의 리더라고 하면 그 영향은 조직 전체의 프로세스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의사의 진료시작시간은 자기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다. 전 시스템이 연결된 시간이다. 스스로 관리해야 할 자원이기도 하지만 병원 차원에서도 함께 관리되어야 할 시간이다. 특히, 첫 진료시작시간은 병원 일의 시작이다. 스타팅 포인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기고자 : 삼정 KPMG 안근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