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슬으슬 추운 11월, 뼛속까지 덥혀 주는 칼국수 한 그릇

입력 2014.11.14 15:14

살랑이던 가을바람이 어느새 찬 기운을 담았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찬 기운에 양손이 슬금슬금 바지주머니로 들어간다. 이럴 때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하지만 국물요리라고 해서 모두 이 시기에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강하고 센 맛을 가진 전골이나 칼칼한 찌개류는 아주 추운 동(冬)장군에 어울리는 메뉴다. 요즘처럼 뼛속까지 은근히 스며드는 것 같은 찬 기운이 퍼질때는 칼국수를 먹어야 한다.

칼국수 사진
칼국수는 어떤 국물을 내서 어떻게 끓여야 한다는 정석이 없다. 편한 재료로 우려낸 국물에 원하는 굵기로 밀고 썰어 넣은 후 끓이면 된다. 밀가루 면에 감긴 은근한 온기가 뼛속 추위까지 은근하게 녹여 낸다.

◇ 은근한 온기 담은 따뜻함

칼국수는 말 그대로 ‘칼로 썰어 만든 국수’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국수가닥을 만든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원초적인 국수 제조 방식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래전부터 친숙하게 즐기던 음식은 아니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귀한 음식에 속했다. 우리나라는 쌀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하얀 밀가루를 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큰 잔칫날 국수를 나누던 풍습을 떠올리면 귀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6·25전쟁 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넘쳐나면서 애증이 서린 서민 메뉴로 자리를 잡았다.

칼국수에는 은은하게 퍼지는 온기가 담겨 있다. 바글바글 또는 펄펄 끓는 즉흥적인 뜨거움이 아니다. 밀가루 전분이 우러나와 있기 때문에 온기가 쉬식지 않는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 차가운 겨울보다는 계절이 바뀌는 간절기에 진가를 발휘한다. 밀가루 면발의 촉촉함은 치아가 부실해도 큰 걱정이 없다. 걸쭉한 국물이 더해져 목넘김은 물론 뱃속까지 편하다.

◇ 푸짐하고 다양한 미학

게다가 칼국수는 만만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집에서나 쉽게 홍두깨로 밀어 먹을 수 있다. 육수도 따질 게 없다. 된장찌개 끓이고 남은 멸치 몇 마리면 오케이다. 고명으로 애호박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먹다 남은 신김치를 송송 썰어 올려도 그만이다. 다행히 달걀이라도 몇 알 있으면 황백지단 부쳐 올려 먹을 수 있다. 또 다른 매력은 나눠 먹기다. 한냄비 끓여서 옆집사람도 부르고, 큰 그릇에 담아 조금씩 덜어 먹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칼국수가 있는 밥상은 늘 따뜻하고 포근하고 훈훈하고 편안하고 넉넉하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쉼표 같은 음식이다. 느리게 살기, 쉬어 가기, 그리고 함께 가기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는 형편이나 지역에 따라 칼국수의 국물이나 고명을 다르게 쓸 수 있고, 면발도 집안 사정이나 칼국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만들 수 있으니 더 좋다. 일반 가정에서 치아가 불편한 어르신이 계시면 반죽을 질게 해서 가늘고 부드러운 면발을 만들었고, 아이들이 많으면 반죽을 단단하게 해서 씹는 맛이 나도록 면발을 뽑았다. 칼국수 국물은 크게 사골, 닭, 해물(멸치) 베이스로 나뉜다. 이 국물에 따라 면발의 굵기도 차이가 있는데, 사골 면발이 가장 가늘고 부드럽다. 이에 반해 해물칼국수는 굵고 단단한 편이다. 닭칼국수는 사골과 해물의 중간 굵기다. 이런 차이는 국물 재료의 귀천(貴賤)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골칼국수는 저작 없는 목넘김의 쾌감을, 해물칼국수는 씹는 쫀득함을 즐기는게 포인트다. 국물에 따라 나뉘는 다양한 종류의 칼국수 메뉴는 아래와 같다.

대통령의 사골칼국수 칼국수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이분 덕분에 서민 음식의 대표 메뉴던 칼국수가 청와대 오찬 단골메뉴로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청와대 칼국수는 일반 서민이 먹던 칼국수와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사골칼국수이기 때문이다. 쇠고기 사골로 육수를 만들고 쇠고기 고명을 얹은 사골칼국수는 안동지역의 양반가에서 주로 먹던 고급 칼국수다.

일반 서민의 멸치칼국수 멸치로 장국을 낸 멸치칼국수가 일반인을 위한 칼국수다. 멸치 국물만 시원하게 내면 별다른 재료가 필요없기 때문에 일반 서민에게 사랑받았고, 칼로리가 낮아 요즘에는 체중조절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귀한 손님을 위한 닭칼국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르던 닭을 잡아 국물을 내고 애호박과 감자를 썰어 넣고 닭칼국수를 끓여 냈다. 사골만큼의 진한 맛은 없지만, 닭 살을 발라내 칼국수에 척척 얹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해안 지역의 바지락칼국수 해안 지역에선 조개를 캐거나 생선을 잡아 국물을 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지락칼국수다. 쫄깃한 조개의 속살을 빼 먹는 재미가 있다.

색다르게 즐기는 별미 칼국수 최근 들어 재료나 끓여 먹는 방식을 달리한 별미칼국수가 전국 곳곳에 선보이고 있다. 고기와 버섯을 샤브샤브 스타일로 즐기다가 칼국수를 넣어 먹는 버섯칼국수가 있고, 남도 지역에서는 청정해역에서만 서식한다는 매생이로 끓인 매생이칼국수나 팥죽에 칼국수를 넣은 팥칼국수를 먹기도 한다. 들깨칼국수,다슬기칼국수 등도 있다.

칼로 썬 면의 직감은 기계로 뽑거나 손으로 빚어낸 면과는 다르다. 쫄깃하면서 뚝뚝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칼로 썬 면의 직감은 기계로 뽑거나 손으로 빚어낸 면과는 다르다. 쫄깃하면서 뚝뚝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 김치 맛이 어우러진 묘미

“김치 맛없는 집 치고, 장사 잘 되는 칼국수집 없다”는 말이 있다. 소문난 칼국수집의 김치는 색도 예쁘고 유난히 맛있다. 대부분 속성으로 절여 만든 겉절이 김치다. 숙성이나 발효를 한다고 해도 길어야 2~3일. 당일치기로 내놓는 것이 많다. 깊은 맛은 없지만 신선한 배추의 아삭거림이 칼국수의 툭툭 끊어지는 맛과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매콤하면서 달달한 맛도 심심한 칼국수에 잘 어울린다. 먹다 말고 종업원을 불러 추가 김치를 요구할 만큼 맛나다. 칼국수집의 김치는 일반 가정집 김치와 담그는 법이 다르다. 몇몇 집의 비법을 들어보면 통고추를 직접 갈아 물에 불려서 쓰고, 마늘을 고춧가루의 양에 버금갈 정도로 듬뿍 넣는 집도 있다. 김치국물로 맹물 대신 칼국수의 기본 육수를 살짝 부어 맛을 내기도 한다.

유지상의 추천 칼국수 맛집
유지상의 추천 칼국수 맛집

※ 이런 이유로 추천합니다 ※

소호정

‘국시’란 이름으로 내놓는 사골칼국수가 이 집의 대표 메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주 찾던 칼국수집으로 유명세를 더했다. 면발이 무척 가늘고 부드러워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가격이 높은 게 흠이라면 흠.

연희동칼국수
한여름에도 칼국수만을 고집하는 집. 12시간 우려낸 진한 사골국물에 국수에서 빠져나온 전분까지 더해져 국물이 무척쭉
하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뛰어난 수육(2만원)을 맛보려면 식사시간에 서두를 것.

육칼
얼마 전까진 ‘칼국수 전문’이라는 허름한 간판 걸려 있던 곳이다. 단골 고객 사이에선 육개장에 칼국수를 넣어 먹는 일명 ‘육칼’집으로 통했다. 얼큰하고 달큰하게 푹 끓인 육개장과 칼국수 면발이 따로 나오는게 특징이다.

할머니칼국수
‘찬양집’과 함께 돈의동 맛 골목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집이다. 멸치국물에 투박한 면발, 그리고 감자와 파, 채썬 호박, 김가루가 전부인 칼국수다. 칼국수를 먹기 전에 만두 반 접시를 시키면 4명의 입이 즐겁다.

서평기사식당
닭곰탕이 있는 닭칼국수 전문집. 서초동에서 영업하다가 일원동으로 이전했다. 24시간 영업으로 늦은 밤 선주후면(先酒後麵) 을 외치는 주당들도 즐겨 찾는다. 식초에 절인 통마늘장아찌가 일품이다.

일산칼국수
닭칼국수 메뉴 하나로 일산의 대표 음식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지락, 북어, 양파등으로 국물을 내 닭고기 맛만의 단순함을피했다. 곳곳에 분점이 생기면서 양이 줄고 맛이 덜하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손국수사골, 양지머리 등으로 우려낸 담백하고 구수한 쇠고기 국물과 푹 삶은 면발이 특징이다. 가늘고 부드러운 면발을 국물과 함께 후루룩 들이켜면 속이 뜨끈해진다. 경상도 지역 제사상에 오른다는 문어랑 먹으면 안성맞춤.

찬양집
50년 넘게 해물칼국수만 팔아 온 돈의동 맛 골목의 전설. 대접 안에 거칠게 뽑은 손국수와 해물이 가득이다. 다 먹고 식탁에 수북하게 쌓인 바지락과 홍합 껍데기를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돈다.

일산등촌샤브칼국수
식탁에서 팔팔 끓여 먹는 버섯칼국수다. 샤브샤브처럼 끓는 육수에 얇게 저민 쇠고기와 버섯을 데쳐 먹은 후 칼국수를 넣어 먹는다. 먹고 남은 국물에 달걀과 온갖 채소를 넣고 볶음밥을 해먹을 수도 있다.

성산동 칼국수
바지락칼국수와 다슬기칼국수를 판다. 두 가지 모두 황태 우려낸 국물에 애호박과 마른 새우를 더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바지락살을 꺼내 먹는 맛도 좋다. 요기용으로 된장을 얹은 미니 공기밥을 준다.

유지상 칼럼니스트
유지상 칼럼니스트

유지상
음식전문기자 출신의 음식칼럼리스트다.
고려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해태제과와 한국소비자원에서 근무한 현장 중심 전문가다.
저서로 《유지상의 테마맛집》, 《내 남자의 앞치마》등이 있다.
한국음식평론가협회 회장, DMZ 10경10미 심사위원장, 2012 ZAGAT 서울레스토랑 선정위원장을 역임했다.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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