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육아', 노년층 우울증 키운다

입력 2010.11.17 08:39

손주 보는 할머니들 건강은… 상당수 수면장애 호소,
아이 위주로 식단 짜다 고지혈증·당뇨병 오기도… 주말엔 자기생활 할 수 있어야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딸 대신 두 살배기 손자를 데려다가 키우는 김모씨(68·서울 정릉동)는 최근 초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김씨는 "아이를 맡고 나서 친구도 못 만나고 집에만 있으니까 사는 게 싫어지더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를 키우는데 우울증이라니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은주 서울아산병원 노인내과 교수는 "맞벌이 자녀의 아이를 키워주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노년층이 많다"며 "약해진 체력으로 아이를 보다가 신체에 무리가 오는 경우가 흔하고,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 아이와 하루종일 지내다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0~3세 영·유아의 70%, 미취학 아동의 35%는 최소 낮 동안 조부모나 외조부모가 돌본다(2009년 보건복지부 아동보육실태 조사). '황혼 육아'로 인한 노년층의 건강 문제가 계속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손주를 키워주는‘황혼 육아’가 늘고 있다. 노년층의 무리한 육아는 수면장애, 심장질환, 우울증 등 다양한 질환의 원인이 된다.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spphoto@chosun.com

수면장애=손자를 봐주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상당수는 수면장애를 경험한다. 수면장애의 기준은 잠드는 데 30분 이상 걸리고 수면 중 2회 이상 갑작스럽게 잠이 깨거나, 원치 않는 시간에 깨어나는 횟수가 각각 주 4회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밤낮을 가리지 못하는 생후 6개월 이하의 영아를 키우면 아기가 깰 때마다 따라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수면장애 상태에 '강제로' 빠지는 것이다.

이은주 교수는 "육아로 몸이 지친 상태에서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하면 혈압이 갑자기 상승해서 겨울철에는 뇌졸중 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진규 서울수면센터 원장은 "밤이든 낮이든 아기의 수면 패턴에 맞춰서 함께 자는 게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며 "특히 아기가 낮잠을 잘 때 집안일을 하면서 깨어 있으면 밤에 닥치는 수면장애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울증=황혼 육아를 하는 조부모가 하루에 10시간 이상 집 주변 등 한정된 곳에서 아이하고만 지내면 정신적인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여성 우울증 환자 4명 중 1명은 황혼 육아가 직·간접적 원인"이라고 말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서 떼를 쓰는 아이에게 온종일 시달리면 식욕 저하, 스트레스, 불면증 등 우울 증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전 교수는 "육아를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면 집 안에 TV나 라디오라도 틀어놓고 고립감을 줄여야 하며, 주말이나 휴가로 아이 부모가 쉬면 반드시 아이를 떼어놓고 자기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절·심장질환=척추·관절질환은 육아를 맡은 노년층이 가장 흔하게 겪는 질병이다. 신규철 제일정형외과병원장은 "한 손에 젖병을 들고 다른 팔로 6~7㎏ 이상 되는 아이를 안는 자세를 반복하다가 팔의 인대가 손상되는 사례가 적잖다"고 말했다. 신 원장은 이어 "손자를 안기 위해 허리를 구부려서 들어 올리면 아이 체중의 10~15배의 충격이 허리에 가해지며, 아이를 안고 나면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려 허리가 앞쪽으로 활처럼 휘어진다"고 말했다. 이런 자세를 반복하면 허리디스크나 척추전방위증이 생길 수 있으므로 아이는 되도록 업고 다녀야 한다.

미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손자를 돌보는 60세 이상 할머니 5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매일 9시간 이상 손자를 보는 사람의 심근경색 발병률이 다른 사람보다 55% 높았다.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심혈관질환 악화 가능성이 더 크다. 김동빈 성바오로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지병이 있는 사람은 육아 스트레스가 심혈관질환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고지혈증·당뇨병=황혼 육아를 하면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식단을 짜고 아이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다. 임수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아이를 보느라고 세 끼를 제때 먹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과자나 초콜릿 등으로 식사를 대신하다가 고혈당, 고지혈증 등이 악화되는 노인이 꽤 있다"며 "번거로워도 아이와 자신의 반찬을 따로 만들어놓고 아이의 식사 패턴과 상관없이 본인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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