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청각으로 ‘K-POP 명곡’을 빚는다… “음악으로 위로 전할 것”

시각장애인 임채섭 작곡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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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섭 작가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함께 음악을 만드는 모델을 계속 확장하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유예진 기자
‘K-POP’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는 ‘트렌디함’이다. 매일 새로운 곡이 등장하고, 유행의 속도도 숨 가쁘게 변한다. 이 치열한 시장에서 시각장애를 딛고 활동해온 작곡가가 있다. EXO ‘EL DORADO’, 소녀시대-태티서 ‘첫눈처럼(First Snow)’, 샤이니 종현 ‘RED’ 등 유명 K-POP 가수들의 명곡을 작업한 임채섭 작곡가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사고로 왼쪽 눈 시력을 잃었지만, 한계를 넘어 꾸준히 곡 작업을 이어왔다. 임채섭 작가를 만나 그의 음악 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작곡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중학교 2학년 때 사고로 왼쪽 눈 시력을 잃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큰 절망을 겪었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만의 재능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혼자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게임 음악을 따라 연주하며 음악의 즐거움을 알게 됐고, 점차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후 부산대 작곡과에 진학해 체계적으로 작곡을 배우며 그 선택을 확신했다. 원래는 종교 음악을 했지만, 더 세련되고 동시대적인 음악을 해보고 싶어 K-POP으로 눈을 돌렸다. 무대 구성과 전주, 멤버 배치 등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점이 내 성향과 잘 맞았다.”

-시력을 잃은 사고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
“중학교 때 교사의 체벌을 받고 머리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이후 망막박리(망막이 안구 벽에서 떨어지는 질환)가 발생했다. 병원에 늦게 가면서 수술 시기를 놓쳤고 결국 실명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왔지만, 최근 심리검사를 통해 그때의 분노와 상처가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은 그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천천히 정리하려 노력하고 있다.”

-시각장애가 있는 상태에서 활동하기에 힘든 점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컴퓨터와 악보를 다루며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화면의 작은 요소 하나를 확인하는 데도 긴 시간이 걸렸고, 듣고 또 들으며 수정하다 보니 작업 속도가 비장애인보다 훨씬 느렸다. 청각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청력에도 무리가 왔다. 2017년 무렵 시력이 더 악화하면서 한동안 5년 가까이 작곡을 중단한 적도 있다. 그 시기에는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떻게 다시 작업을 이어갔나?
“보조 기술이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됐다.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지원을 통해 전자 확대경 ‘조디’를 사용하게 됐고, 아이맥의 화면낭독 기능 ‘VoiceOver’와 화면 확대 기능을 적극 활용했다. 커서 위치와 메뉴 정보를 음성으로 확인하며 작업 환경을 새로 구축했다. ‘시력을 잃는 속도보다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를 더 빠르게 하자’는 마음으로 장비에 익숙해졌다. 그 과정을 거치며 다시 음악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평소 곡 작업 방식은?
“‘티스푼’이라는 작곡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본 멜로디와 가사가 나오면 편곡과 믹싱을 맡아 곡을 완성한다. 집 작업실에서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인 ‘Logic Pro’를 사용한다. 화면에 보이는 메뉴와 커서 위치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VoiceOver)과 글자를 크게 확대하는 기능을 함께 켜두고 작업한다. 태블릿 PC를 컴퓨터와 연결해 건반처럼 두드리며 음을 입력하고, 눈이 피로한 날에는 화면 내용을 점자로 변환해주는 점자 디스플레이를 활용한다. 산책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는 휴대전화 음성 메모에 녹음해 두었다가,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들으며 다듬는다.”

-시각 정보가 제한된 환경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나?
“시각이 약해진 대신 청각과 촉각은 더 예민해졌다. 한 소절을 반복해 들으며 미세한 음의 차이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고, 그 덕분에 디테일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다. 손의 근육 기억으로 건반 위치와 프로그램 구조를 익혀 눈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남들보다 느릴 뿐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속도로 끝까지 완성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치열한 K-POP 시장에서 작곡가로서 중심에 두는 가치는 무엇인가?
“빠른 트렌드를 좇기보다 음악의 본질을 지키고 싶다. 아버지가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음악을 만들라’고 남긴 유언이 나의 기준이다. 유행은 바뀌어도 진정성과 메시지는 남는다고 믿는다. 듣는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5년 만에 다시 발표한 ‘WE(With Equality)’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다. 오랜 공백 끝에 다시 음악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의미였다. 내 음악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의 목표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팀 ‘티스푼’과 함께 K-POP뿐 아니라 OST와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계획이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함께 음악을 만드는 모델을 계속 확장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음악 활동과 더불어 강의와 강연 활동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과정과 작업 방식, 기술을 활용해 한계를 넘어온 경험을 나누고 싶다. 음악과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 혹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