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부터 넥타이 색까지… '루틴'과 '강박' 사이

입력 2021.12.01 17:00

운동선수·정치인 넘어 확산… "집착하면 불안으로"

발로 경기장 라인을 닦은 뒤 라켓으로 신발을 턴다. 이후 바지 엉덩이 부분과 티셔츠 어깨 부분을 차례대로 정리하고, 양쪽 머리카락과 코를 한 번씩 만진다.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35·스페인)의 서브 루틴이다. 운동선수에게 루틴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운동선수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크고 작은 루틴을 하나 이상 갖고 있다. 시험이나 면접이 있는 날이면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거나, 중요한 미팅·발표일에는 특정 색깔의 넥타이만을 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과유불급. 과도한 루틴과 루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존은 강박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라파엘 나달
라파엘 나달은 경기 전 생수병 2개를 벤치 근처에 세워놓고 상표가 코트 쪽을 향하게 하는 등 10여개 경기 관련 루틴을 갖고 있다./사진=연합뉴스DB

◇나달, 루틴만 10여개… 출근 준비, 씻는 순서도 일종의 루틴
운동선수나 정치인, 기업인 등의 다양한 루틴은 매번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나달의 경우 서브 루틴 외에도 경기 전, 경기 중 10여개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며, 손흥민(토트넘 홋스퍼),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선수들도 훈련을 하거나 경기장에 입장할 때, 또는 경기 중 자신만의 루틴이 정해져있다.

루틴의 범주는 매우 넓다. 운동선수들처럼 구체적으로 정해져 철저히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는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순서, 씻는 순서, 옷을 입는 순서 등 평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나만의 ‘순서’들도 작은 루틴이 될 수 있다.

◇마음 가라앉히고 시작하게 해주는 ‘루틴의 효과’
개수와 중요성을 떠나서 루틴은 분명한 장점을 갖는다. 루틴을 지킴으로써 긴장감, 불안한 마음 등을 가라앉히고, 계획했던 일에 순조롭게 임할 수 있다. 많은 루틴이 경기, 시험, 발표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행해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루틴이 주는 심리 안정 효과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실제 나달 역시 과거 인터뷰를 통해 루틴을 지킴으로써 경기에 집중하고 심리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루틴은 약을 먹거나 외출 전 물건을 챙기는 등 평소 잊어선 안 되는 일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주변에서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여러 생활습관을 루틴으로 정해두고 지키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창수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보거나 양치를 하면 일단 출근 준비를 시작하게 되고, 출근 후 밀린 메일을 확인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는 것처럼 루틴은 하루 일과, 또는 특정한 일을 시작하게 해주는 ‘시작 버튼’과도 같다”며 “무기력에 빠진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과도한 루틴 집착, 불안·강박으로 이어질 수도
루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순간, 루틴의 효과는 부작용으로 변한다. 좋은 루틴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건강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면, 루틴에 대한 심한 집착은 불안감을 유발하고 집중력을 흩트려놓는다. 루틴을 지켰을 때 얻는 안정감이 크다면, 반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생기는 불안감이 커질 수도 있다. 실제 루틴의 중요성을 높게 여기는 사람의 경우, 루틴을 지키지 못했을 때 집중력이 크게 흔들리거나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흔히 루틴을 ‘징크스’, ‘양날의 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부 운동선수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루틴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루틴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집착은 강박장애 증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강박장애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 부적절하고 지나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강박사고로 인해 특정 행동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건강한 루틴은 강박장애와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루틴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들의 경우 강박장애 증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창수 교수는 “루틴에 집착하다보면 불안감이 커져 정작 해야 할 일을 잊고 루틴을 지키는 일에만 급급하거나, 루틴을 지키지 못했을 때 크게 화를 내는 등 강박장애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원하는 대로 일이 안 풀릴수록 일이 아닌 루틴에서 원인을 찾고, 이로 인해 루틴에 대한 집착·강박 또한 더욱 심해진다”고 설명했다.

펜이 정리된 모습
건강한 루틴을 위해서는 루틴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본연의 업무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루틴은 루틴일 뿐… “분명한 목표 세우고 맞는 루틴 찾아야”
루틴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루틴을 만드는 동시에, 적절한 방식으로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루틴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도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본연의 업무를 잊고 루틴에만 빠져있지 않은지, 너무 많은 루틴을 만들고 이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돌아봐야 한다. 또한 루틴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한 교수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루틴을 지키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목표 의식이 불분명할수록 루틴에 더욱 집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지키고 있는 루틴이 자신에게 적합한 루틴인지 또한 따져볼 문제다. 일부 사람의 경우 닮고 싶은 사람의 루틴을 무작정 따라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루틴이 곧 ‘맞는 루틴’을 의미하진 않는다. 한창수 교수는 “루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면, 지키지 못했을 때 상당한 영향을 주는 루틴이 무엇인지 적어보고 이를 수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지키지 않아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일상적인 일처럼 루틴을 계획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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