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 강국 싱가포르 방문기
21시 30분.
8월의 마지막 일요일 밤,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면세구역을 분리하고 있는 출입문을 나서니 입국장 한 쪽에 위치하고 있는 ‘락사(laksa, 매콤한 국물에 코코넛 밀크와 건새우, 어묵 등을 넣은 싱가포르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생소한 향을 맡으니 ‘물 건너 왔다’는 실감이 났다.
취재차 병원을 전전하다 갑자기 싱가포르로 떠난 이유는 ‘사이언스미디어아카데미’ 때문이다. 사이언스미디어아카데미는 과학기자협회에서 기자들의 역량 개발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연수 프로그램이다. “보다 많은 기자에게 과학, 의학 분야 선도 역할을 하는 R&D 현장을 체험하게 해 주고, 연구자와 소통 기회를 가지기 위해 올해부터 처음 운영하게 됐다”는 게 과학기자협회 설명이다.
주말 밤부터 타국 땅을 밟은 만큼,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첫째 날 월요일 댓바람부터 로비에 집합한 기자 8명은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퀸스타운에 위치한 생명공학 연구단지 ‘바이오폴리스(Biopolis)'로 이동했다. GIS(Genome Institute of Singapore, 싱가포르지놈연구소)와 IME(Institute of Microelectronics,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연구소) 방문을 위해서였다. 두 기관은 모두 싱가포르 과학기술청 ‘A*STAR' 산하 연구소다.
연구원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싱가포르 정부는 생명공학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였다. 장점이 확실하다면 새로운 기술이라도 진입 장벽이 낮고, 물질적인 지원도 크다는 게 과학자들의 공통 의견이었다.
2015년 싱가포르에서 체외 진단키트 개발 스타트업 ‘원바이오메드’를 설립한 박미경 대표는 “기업이 입주해 연구할 수 있는 연구실과 장비, 인력을 지원해주는 나라가 싱가포르”라며 “실제 우리 회사로 소속된 직원은 3명 뿐, 나머지 직원은 GIS와 IME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며 연구실이나 장비도 IME 지원을 받았기에 창업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원래 한국에서 창업을 준비했지만, 제도나 문화의 한계를 느꼈다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A*STAR는 1년에 1700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기업과 함께한다. 원바이오메드처럼 가능성이 풍부한 스타트업을 지원해주는 일도 연간 14건 정도다.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조남준 교수는 “싱가포르 정부는 5년 단위로 미래에 국가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술을 예측, 재정적 지원을 계획하며 기초 연구를 담당하는 대학과 이를 실용화하는 기업을 중개해주는 역할도 함께 한다”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인재가 모이며, 개발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을 정부가 공유하는 편이라 국가도 이득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두 번째 날부터 3일동안은 싱가포르에 위치한 글로벌 제약사를 돌아가며 방문했다. 암젠, 릴리, 애브비, GSK 등이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0년부터 바이오 제약 기업에게 15년 동안 법인세를 면제해 주거나, 40년 동안 기본 법인세율 17%보다 낮은 법인세율 혜택을 제공해 글로벌 제약사를 유치했다. 싱가포르에 글로벌 제약사가 몰려있는 이유다.
이번 사이언스미디어아카데미를 통해, 암젠은 언론에 처음으로 싱가포르에 있는 차세대 바이오 제조 공장을 공개했다. 골질환이나 암 치료 분야 원료 약품을 생산하는 해당 시설은 생산 유연성·효율성·속도를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핵심 설비와 시스템을 도입한 게 특징이다. 생산 시설 특징상 화장품을 바르고 가면 안 된다는 말에 다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공장을 견학했다.
바이오 생산 분야의 화두로 떠오른 ‘일회용 공정’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어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해당 시설은 ‘단일사용시스템’(single-use system)과 ‘모듈화설계방식’(modular design and construction)‘을 이용, 스테인리스 스틸로 이뤄진 대형 반응기와 파이프 등 고정 시설을 변형과 이동이 가능한 장비와 일회용 비닐백, 플라스틱 튜브 등으로 대체한 게 특징이다. 사용할 때 매번 제조 용기를 씻어내는 게 아니라 플라스틱 백만 교체하는 식이다.
암젠 싱가포르 생산시설 제조부문 총괄 책임자 토드 왈드론은 “단일사용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공정을 사용해 모듈별 공정이 진행되고, 공업용수 등을 사용한 청소도 필요 없다”며 “이로 인해 기존 생산시설대비 이산화탄수 배출량과 에너지 사용량이 약 70% 줄어들었고, 공업용수 사용량은 약 45% 줄어들어 생산성과 환경 측면 모두 잡았다는 평가를 듣는다”고 말했다.
릴리 임상약학센터(LCCP) 견학도 흥미로웠다. 물질이 오염되면 안 된다는 말에 기자들은 모두 오염 물질을 차단하는 실험복을 입고 설명을 들었다.
LCCP는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 유일의 임상 1상 센터다. 임상 1상은 신약후보물질의 효능과 안전성을 처음으로 사람에게 시험해 보는 단계며, 상용화 가능한지를 판단하는 기초이기도 하다. 연간 10여 개 신약후보물질을 시험하며, 이 중 1개 정도면 2~3상을 거쳐 실제 제품화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임상 1상 연구 20건을 포함해 모두 169건을 수행했다.
LCCP 로난 켈리 연구소장은 “임상 1상이 중요한 이유는 약물 개발의 기초기 때문”이라며 “적절하지 않은 약물이라고 판단되거나 이후 단계의 임상 수행에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임상 1상 센터는 후속 과정중단을 권고, 임상에 들어가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있다”며 "1개의 1상 시험 성공을 위해 드는 인력과 비용은 무척 큰데, 싱가포르 정부에서 1상 시험의 중요성을 높이 사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