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그 후]
암 치료를 하는 의료진은 매일 두려움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환자들을 마주합니다. 헬스조선 아미랑은 강릉아산병원 유방외과 윤광현 교수 칼럼을 연재해 '암 치료와 회복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를 독자와 나누려 합니다. 어떤 마음가짐이 치료를 견디게 했는지, 무엇이 환자를 다시 삶으로 돌아가도록 했는지 등을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벌써 7년째 살아가고 있는 강원도 강릉. 병원 창문 너머로는 동해의 넓은 바다와 대관령의 장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대도시의 빽빽한 빌딩 숲에서는 보기 힘든 푸른 하늘과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맑은 공기가 일상이 된 곳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지역이지만 봄철이면 건조한 날씨 속에 산불을 걱정해야 하고,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가뭄을 걱정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의 위협이 늘 같은 자리에 공존한다.
사람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 우리 병원에는 여느 대도시와 다르지 않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분들뿐만 아니라 바닷가 어촌 마을과 깊 산골의 작은 마을에 사는 분들도 찾아온다. 서로를 잘 알고 이웃사촌처럼 지내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다. 겉으로는 정겹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누구나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몇 년 전, 50대 초반의 경도 지체장애를 가진 한 여성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다. 이전부터 오른쪽 유방에 멍울이 만져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내다가 복지사분의 설득 끝에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경계심이 무척 강했다.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복지사분에게 먼저 이야기하면 그분이 다시 나에게 내용을 전달하곤 했다. 진찰을 할 때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국가암검진도 오랫동안 받지 않았다고 했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었지만 식단 관리나 운동 등 규칙적인 건강관리가 쉽지 않았고 흡연도 지속 중이었다.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사람에 대한 깊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수술 전날 그녀는 복지사분이 아닌 마을 교회 목사님 사모님과 함께 내원했다. 등에는 제법 큰 배낭 하나를 메고 있었다. 입원 기간 동안 사용할 짐을 챙겨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는 현금 470만 원과 그녀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몇 가지 물건이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50여 년을 살아오며 모은 전 재산이었다. 집을 비우는 동안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모두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가 살아온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서로 왕래가 잦고 집안 사정도 훤히 알고 지내는 곳이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반찬을 나누며 정을 나누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언제나 배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 없이, 약간의 장애를 가진 채 홀로 살아오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시간과 노동, 그리고 자신의 것을 너무 쉽게 내어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부탁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거절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전 재산이 담긴 배낭을 품에 안고서도 경계심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수술은 잘 끝났다. 다행히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큰 부담 없이 수술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수술 전부터 달라질 본인의 모습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지만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처 소독을 할 때마다 수술 부위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치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측 유방 절제술 이후에도 여덟 차례의 항암 치료가 예정되어 있었다.
항암 치료 후에는 며칠간 심한 근육통과 피로감이 이어진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가 평생 힘든 시간을 견뎌온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근육통이 없어질 때까지만 병원에 있으면 안 될까요?”
몸이 아픈 것도 힘들었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몸이 힘든 상황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부탁과 심부름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항암 치료로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항암 치료 후 통증이 가라앉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술과 항암 치료가 필요한 이유를 반복 설명했고 치료 중 주의해야 할 점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어느 날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어느 날은 새 가발을 쓰고 외래에 와서 환하게 웃으며 보여주었다. 처음 진료실에서 만났던 경계심 가득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복지사분이 곁을 지켜주었고, 수술 전날 함께 내원했던 사모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준 사회사업팀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믿지 못하던 그였지만 치료 과정을 지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을지라도 결국 다시 사람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전 재산이 든 배낭을 품에 안고 사람을 경계하던 그는 이젠 새 가발을 쓰고 환하게 웃으며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으로 미소를 되찾은 그녀처럼, 다른 많은 암 환자분들도 알았으면 한다. 암이라는 질병이 가져다준 두려움과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고 외로울지라도 곁에는 함께 고민하고 동행하는 이들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지역이지만 봄철이면 건조한 날씨 속에 산불을 걱정해야 하고,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가뭄을 걱정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의 위협이 늘 같은 자리에 공존한다.
사람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 우리 병원에는 여느 대도시와 다르지 않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분들뿐만 아니라 바닷가 어촌 마을과 깊 산골의 작은 마을에 사는 분들도 찾아온다. 서로를 잘 알고 이웃사촌처럼 지내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다. 겉으로는 정겹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누구나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몇 년 전, 50대 초반의 경도 지체장애를 가진 한 여성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다. 이전부터 오른쪽 유방에 멍울이 만져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내다가 복지사분의 설득 끝에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경계심이 무척 강했다.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복지사분에게 먼저 이야기하면 그분이 다시 나에게 내용을 전달하곤 했다. 진찰을 할 때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국가암검진도 오랫동안 받지 않았다고 했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었지만 식단 관리나 운동 등 규칙적인 건강관리가 쉽지 않았고 흡연도 지속 중이었다.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사람에 대한 깊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수술 전날 그녀는 복지사분이 아닌 마을 교회 목사님 사모님과 함께 내원했다. 등에는 제법 큰 배낭 하나를 메고 있었다. 입원 기간 동안 사용할 짐을 챙겨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는 현금 470만 원과 그녀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몇 가지 물건이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50여 년을 살아오며 모은 전 재산이었다. 집을 비우는 동안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모두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가 살아온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서로 왕래가 잦고 집안 사정도 훤히 알고 지내는 곳이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반찬을 나누며 정을 나누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언제나 배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 없이, 약간의 장애를 가진 채 홀로 살아오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시간과 노동, 그리고 자신의 것을 너무 쉽게 내어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부탁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거절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전 재산이 담긴 배낭을 품에 안고서도 경계심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수술은 잘 끝났다. 다행히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큰 부담 없이 수술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수술 전부터 달라질 본인의 모습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지만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처 소독을 할 때마다 수술 부위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치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측 유방 절제술 이후에도 여덟 차례의 항암 치료가 예정되어 있었다.
항암 치료 후에는 며칠간 심한 근육통과 피로감이 이어진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가 평생 힘든 시간을 견뎌온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근육통이 없어질 때까지만 병원에 있으면 안 될까요?”
몸이 아픈 것도 힘들었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몸이 힘든 상황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부탁과 심부름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항암 치료로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항암 치료 후 통증이 가라앉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술과 항암 치료가 필요한 이유를 반복 설명했고 치료 중 주의해야 할 점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어느 날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어느 날은 새 가발을 쓰고 외래에 와서 환하게 웃으며 보여주었다. 처음 진료실에서 만났던 경계심 가득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복지사분이 곁을 지켜주었고, 수술 전날 함께 내원했던 사모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준 사회사업팀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믿지 못하던 그였지만 치료 과정을 지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을지라도 결국 다시 사람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전 재산이 든 배낭을 품에 안고 사람을 경계하던 그는 이젠 새 가발을 쓰고 환하게 웃으며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으로 미소를 되찾은 그녀처럼, 다른 많은 암 환자분들도 알았으면 한다. 암이라는 질병이 가져다준 두려움과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고 외로울지라도 곁에는 함께 고민하고 동행하는 이들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암 극복을 위한 필수 지침, 아미랑
암으로 지친 마음 달래는 힐링 레터부터 극복한 이들의 노하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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