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쓰려 약 추가, 어지러워 또 추가”… 부모님 약 봉투가 위험하다

10종 이상 복용 '초다제약물' 노인 144만 명… 5년 새 54% 증가
부작용이 또 다른 처방으로 이어지는 '연쇄 처방'의 덫
전문가들 "무조건 약 줄이기보다 '부적절한 약물' 점검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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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사진=클립아트코리아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이모(78)씨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알약 14알을 한꺼번에 삼킨다. 고혈압과 당뇨병 약을 시작으로 무릎 관절염 진통제, 위장약, 어지럼증 치료제에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까지 합치면 하루 복용량만 수십 알에 달한다. 이씨는 "속이 쓰리면 위장약을 처방받고, 어지러우면 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어느새 약이 하나둘씩 늘었다"며 "이제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라고 말했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이씨처럼 여러 약을 장기간 함께 복용하는 노인이 빠르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만성질환을 1개 이상 진단받고 10종(성분) 이상의 약물을 60일 이상 복용한 '과도한 다제약물' 복용자는 143만8831명으로, 2020년(93만2731명)보다 54.3% 증가했다. 전체의 82.1%는 65세 이상이었다.

문제는 약의 개수 자체보다, 관리되지 않는 다제약물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연쇄 처방'이다.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약을 걸러내고 환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약 줄이기'가 아니라 꼭 필요한 약과 불필요한 약을 구분하는 체계적인 약물 관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약이 병을 만들고, 또 다른 약을 부른다"
노인은 젊은 층보다 약물 부작용에 훨씬 취약하다. 나이가 들면 간 기능과 혈류량이 감소해 약물을 분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신장이 혈액을 걸러 노폐물을 배출하는 기능(사구체 여과율)도 함께 저하된다. 이 때문에 약물이 몸 밖으로 충분히 배출되지 못한 채 체내에 오래 머물게 되며, 결국 같은 용량을 복용하더라도 혈중 농도가 높아지고 부작용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서울특별시 서남병원 문성진 노인진료센터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여러 의료기관을 이용하며 질환별로 약을 처방받다 보면 약의 종류가 점점 늘어나고 중복 처방이나 약물 간 상호작용이 발생하기 쉽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염진통제의 중복 복용이다. 문 센터장은 "근골격계 질환으로 여러 병원을 다니며 진통제와 소염진통제를 함께 복용하다 소화불량이나 속쓰림이 생기고, 장기간 지속되면 간 기능 이상이나 신장 기능 저하로 이어지는 어르신이 적지 않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연쇄 처방'이다. 약물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을 새로운 질병으로 오인해 이를 치료하기 위한 또 다른 약이 추가되면서 약이 계속 늘어나는 악순환이다. 문성진 센터장은 "치매약 복용 후 부작용으로 요로 증상이 나타났을 때 이를 새로운 질환으로 판단해 항콜린제 약물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다"며 "하지만 항콜린제는 오히려 인지 기능을 악화시켜 치매 증상을 심화시키거나 섬망(일시적 정신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늘픔가치 박상원 대표(약사)도 "칼슘차단제 계열 고혈압약으로 다리 부종이 생기면 이뇨제를 추가하고, 이뇨제로 전해질 이상이나 피부 건조 등이 생겨 또 다른 약을 찾게 되는 식으로 약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며 "소염진통제 부작용인 위장장애 때문에 제산제를 먹고, 다시 변비약을 추가하는 사례도 임상 현장에서 흔하다"고 했다.

◇다제약물 자체가 아닌 '부적절한 다제약물'이 문제
여러 약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혈압, 당뇨병, 심부전, 고지혈증 등 여러 만성질환을 함께 앓는 노인에게 다양한 약물을 병용하는 것은 표준 치료인 경우가 많다. 박상원 약사는 "각 약이 명확한 진단에 따라 처방되고 상호작용이 관리되며 얻는 이득이 위험보다 크다면 '적절한 다제약물'"이라며 "문제는 중복 처방이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약이 관성적으로 유지되는 '부적절한 다제약물'"이라고 말했다.

부적절한 다제약물이 지속될 경우 환자의 건강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의 연구에 따르면 5종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는 65세 이상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입원 위험이 18%, 사망 위험이 25% 높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공주대 공동 연구에서도 180일 이상 다제약물(10종 이상)을 과도하게 복용한 65~84세 노인은 비복용자보다 입원 위험이 1.85배, 응급실 방문 위험이 1.92배 높았으며, 사망 위험은 2.5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혈압이 정상이라 끊었어요"… 스스로 약 줄이는 것도 위험
약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의사나 약사와 상의 없이 스스로 약을 줄이거나 끊는 것도 위험하다. 보건의료계 통계에 따르면 노인 환자의 복약 거부 원인 가운데 절반 이상(53%)은 환자가 임의로 약을 조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성진 센터장은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약이 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완치로 오해해 약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속이 쓰리거나 어지럽다는 이유로 특정 약을 임의로 빼는 것도 핵심 질환의 관리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약물 부작용과 노화 증상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인지기능 저하, 무기력감, 보행 장애, 식욕 저하 등 약물 부작용은 단순 노화나 치매 진행으로 나타나는 증상과 매우 비슷해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 의료진도 기존 질환의 악화로 오인하기 쉽다. 박상원 약사는 "가정 방문을 해보면 통증약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약을 임의로 중단하고, 통증을 피하려 활동량까지 줄이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며 "필요한 진통소염제를 적절히 복용하면서 회복을 위한 운동과 활동량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신체 기능 저하와 노쇠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필요한 것은 '약 줄이기'가 아니라 '약 점검'
전문가들은 다제약물 관리의 핵심은 약의 개수가 아니라 '적절성'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꼭 필요한 약은 유지하되, 불필요하거나 중복된 약만 전문가와 함께 단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안전한 약물 관리의 기본이라는 의미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방법이 '탈처방(Deprescribing)'이다. 환자가 복용 중인 처방 약은 물론 일반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까지 모두 확인한 뒤 각각의 필요성과 중복 여부, 부작용 위험을 평가해 불필요한 약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박상원 약사는 "다제약물 관리의 목표는 약을 무조건 줄이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약은 유지하고 불필요한 약만 정리하는 것"이라며 "환자가 실제 복용하는 모든 약과 건강기능식품을 한자리에서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도 이러한 취지에서 2018년부터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2020년부터는 의사·약사·간호사가 함께 참여하는 '다제약물 관리사업 병원모형'을 운영하고 있다. 10종 이상의 약물을 상시 복용하는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포괄적인 약물 평가와 처방 조정 등을 실시한 결과, 65세 이상 환자의 1개월 후 응급실 방문 위험은 50%, 3개월 후 재입원 위험은 21% 감소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현장의 구조적 한계는 여전하다. 10종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노인이 140만 명을 넘어섰지만, 사업 참여 병원은 전국 86곳(2026년 기준)에 불과하다. 입원 중 이뤄진 약물 검토 결과가 퇴원 후 동네 의원이나 약국으로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는 분절된 의료 전달 체계도 해결 과제로 꼽힌다. 사업이 7년째 건강보험공단 시범사업 형태로 운영되면서 매년 별도의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점도 안정적인 확대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다행히 정책적 기반은 조금씩 마련되고 있다. 올해 3월 시행된 '돌봄통합지원법'에는 약사의 재가(가정 방문) 약물 관리 서비스 근거가 명시됐고, 최근에는 약사의 역할을 단순 복약지도에서 '의약품의 적정 사용과 지속적인 관리 지원'까지 확대하는 법안도 국회에 발의됐다. 전문가들은 병원과 지역사회, 의사와 약사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통합 관리 체계가 구축돼야 다제약물 문제를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문성진 센터장은 "약은 더하는 것만큼 줄이는 것도 치료"라며 "여러 약을 장기간 복용하는 어르신이라면 정기적인 약물 검토를 통해 본인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건강한 노년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환자와 보호자가 꼭 알아야 할 '안전 복약' 3가지 수칙
전문가들은 의사나 약사가 시스템만으로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말한다. 개인정보 보호 규정과 시스템 연계의 한계로 타 병원의 처방 이력을 실시간으로 전수 조회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환자와 보호자가 스스로 복용 정보를 관리하는 것이 안전한 약물 사용의 첫걸음이다.

① 처방전·약 봉투는 버리지 말고 모아두기
가장 쉽고 효과적인 약물 관리법은 처방전이나 처방 내역이 적힌 약 봉투를 버리지 않고 날짜별로 보관하는 것이다. 새로운 병원이나 약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를 보여주면 중복 처방이나 약물 상호작용을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박상원 약사는 "약 봉투를 날짜순으로 파일에 모아두고 병원이나 약국에 갈 때마다 보여주는 습관만으로도 약물 부작용과 중복 처방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② 영양제·한약·일반의약품도 반드시 알리기
처방 약뿐 아니라 건강기능식품과 일반의약품, 한약도 의료진에게 빠짐없이 알려야 한다. 박상원 약사는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를 복용하는 환자가 오메가3, 은행잎 추출물, 비타민E 등을 함께 섭취하면 출혈 위험이 커질 수 있고, 칼슘·철분·마그네슘 보충제는 일부 항생제나 갑상선호르몬제의 흡수를 방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성진 센터장 역시 "평소 복용하는 영양제와 한약까지 모두 의료진에게 알려야 약물 간 상호작용과 중복 처방·복용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③ 알약 개수보다 '성분 수' 확인하기
하루에 먹는 알약이 몇 개 되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는 두세 가지 이상의 성분을 한 알에 담은 '복합제'가 흔하게 사용된다. 겉으로는 알약 한 개지만 실제로는 여러 활성 성분을 동시에 복용하는 것과 같아, 전체 복용 성분 수는 다제약물 기준(통상 5개 이상)을 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알약 개수만 세기보다 처방전에 적힌 성분명과 중복 여부를 의사·약사와 함께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