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보다 중요한 건 함께 뛰는 법… 발달장애인 축구단 ‘루멘FC’[조금 느린 세계]

입력 2026.05.27 13:11
바닥 장애물 뛰는 모습
루멘FC 선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신소영 기자
평일 저녁, 경기도 수원의 한 실내 축구장. "패스!", "친구 챙겨야지" 우렁찬 목소리가 체육관 안을 가득 채운다. 여느 유소년 축구 교실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곳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흐른다. 공을 발끝으로 제대로 차는 데만 꼬박 5년이 걸린 아이들, 승패보다 '함께'를 먼저 배우는 이들이 모인 곳. 발달장애인 축구단 '루멘FC'를 만났다.

라틴어로 '빛'이라는 뜻의 루멘(Lumen)FC는 지난해 9월 정식 창단했다. 박용환 감독(41)과 안서진 코치(40)를 비롯한 선수 출신 지도진 네 명이 이끌고 있다. 안 코치는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만큼은 가장 빛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며 "부모님들이 '아이에게서 희망을 보게 됐다'고 할 때, 아이들이 축구를 통해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해내는 모습을 볼 때 루멘FC의 의미를 다시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앉아서 만세하는 선수들
루멘FC 선수들./사진=신소영 기자
◇장애 기능 상관없는 유일 축구단
루멘FC의 시작은 5년 전 무료 축구 봉사였다. 비장애 아동에게 축구가 진로와 꿈을 키우는 스포츠였다면, 장애 아이들에게는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취미에 불과했다. 박용환 감독은 "발달장애 아이들이 평일에도 꾸준히 다닐 곳, 또래와 어울리며 소속감을 느낄 공간이 거의 없었다"며 "부모님들의 '우리 아이도 팀에 속해봤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이야기에 무리해서라도 센터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루멘FC에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발달장애인이 함께 훈련하고 있다. 장애 기능 정도와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수원뿐 아니라 서울, 화성 등에서 왕복 두 시간 넘게 이동하는 가족도 적지 않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전문 축구 교육기관이 드문 탓이다. 입소문을 타며 개설 첫해부터 7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였다.

선수들의 애정도 각별하다. 올해 2월 입단한 김송우(19) 선수는 "축구장 오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며 "선생님들이 늘 잘 챙겨주시고 속상할 때 위로도 많이 해주셔서, 축구하면서 힘든 건 하나도 없고 계속 재밌다"고 말했다. 대학생 시절 축구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이민규(25) 선수에게도 루멘FC는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심각한 발목 부상 이후 축구를 포기할까 고민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팀에 합류했다. 그는 "너무 아파 울기도 했지만 지금 목표는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축구하는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장에서 둘러안고 모인 모습
루멘FC 선수들이 경기 전 모여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안서진 코치 제공
◇승패보다 "같이·양보·배려"
루멘FC의 축구 수업은 매 순간 '자율 속의 질서' 를 잡는 과정이다. 훈련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단어는 "같이", "양보", "배려"다. 축구는 팀 스포츠지만, 발달장애 선수들에게 협동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보다 행동이 앞서거나, 자기만의 방식에 익숙해 돌발 행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표현이 서툴러 훈련 중 다툼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도진은 반복 훈련과 상황극을 통해 '함께하는 법'을 가르쳤다. 기능이 높은 선수가 낮은 선수를 챙기고, 누군가 실수하면 기다리는 법을 익혔다. 안 코치는 "처음에는 자기 것만 챙기던 아이들이 이제는 친구 신발까지 챙겨주고 먼저 도와준다"며 "반복 훈련을 하면 속도는 느릴 뿐 분명히 달라진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승패보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경험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골을 넣으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동료 덕분'이라고 말하도록 한다"며 "골을 넣은 아이도, 패스를 한 아이도, 벤치에 있던 아이도 모두 팀의 일원으로 함께 존재했다는 경험 자체가 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큰 발판"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부모들이 먼저 체감한다. 집에서 짜증이 줄고 생활 리듬이 안정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조용했던 아이가 자신감 있게 변하거나, 학교에서 통제가 어려웠던 아이가 "축구 못 간다"는 말 한마디에 행동이 달라졌다는 사례도 적지 않다. 1년 가까이 말을 거의 하지 않던 김지훈(29) 선수는 지금 주장으로서 파이팅 구호를 외친다. 운동장을 벗어나기 바빴던 아이들은 어느새 포지션을 이해하고 팀 경기에 참여한다. 안 코치는 "예전에는 운동장 안에만 끝까지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라며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 끝까지 함께 뛰는 것 자체가 큰 변화"라고 말했다.

실력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루멘FC 선수들은 한 달에 한두 차례 전국 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최근 친선 경기에서는 3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수비수 장상욱(38) 선수는 "예전에 대회 예선 탈락이 아쉬웠다"며 "루멘FC 팀원들과 열심히 훈련해 언젠가는 경기도 대표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단체 사진
수원시 최초 발달장애인 축구팀 루멘FC./사진=신소영 기자
◇1대1 돌봄 필요한데… 발달장애 스포츠의 벽
현재 루멘FC의 훈련과 교육비는 전액 무료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스포츠를 포기하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다. 지도진은 후원사를 찾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고, 여러 기관과 기업의 도움으로 유니폼, 스포츠 음료, 겨울 패딩 등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인력과 처우다. 발달장애인 스포츠는 일반 체육보다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순간적인 돌발 행동에 대응하고 개별 지도를 하려면 사실상 1대1에 가까운 관리가 요구된다. 박 감독은 "비장애 축구는 지도자 한 명이 10명의 아이를 통제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 수업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지원 규모나 단가가 너무 낮아 선수 출신 전문 지도자를 채용하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화·예술(미술·음악 등) 분야와 비교하면 장애인 스포츠 체육 공모사업은 예산 규모와 지원 건수 모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시설 부족도 큰 어려움이다. 장애인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운동장은 사실상 찾기 어렵다. 더위에 취약한 선수들이 많지만 기본적인 쉼터조차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루멘FC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기업과 연계해 아이들이 '축구 선수'라는 정식 직업을 갖고 자립할 수 있는 미래까지 구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 코치는 독자들에게 '편안한 시선'을 부탁했다. 그는"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웃거나 말이 조금 서툴더라도 동정이나 편견 없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바라봐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루멘FC 같은 팀이 하나의 좋은 사례가 돼 장애인 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지도자와 기관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며 "더 많은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성장할 기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