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없으면 무조건 CPR? 한국 응급처치 교육의 맹점

입력 2026.03.27 15:11

고령화로 늘어난 '이차적 심정지'
CPR 중심 교육만으로는 한계
기도 폐쇄·저혈당·출혈 대응 부족
미국·유럽은 '예방 중심' 통합 교육
"심정지 이후 대응에서 예방 중심으로 전환을"

병원 밖에서 발생한 심정지는 1분 1초가 생사를 가르는 대표적인 응급 상황이다. 심정지 발생 시 즉각적인 심폐소생술(CPR)이 생존율을 좌우하는 핵심 처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전문가들은 "CPR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며 "심정지 이후 대응뿐 아니라, 발생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응급처치 체계를 확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월 개정된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에 처음으로 '응급처치(First Aid)' 개념이 포함된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변화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교육이 CPR 중심에 치우쳐 있다. 실질적 전환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고령화로 달라진 응급상황… 심장만 봐선 안 된다
현재 지방자치단체와 대한심폐소생협회 등이 시행하는 응급처치 교육은 대체로 심정지 이후 대응, 즉 CPR 중심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고령화로 변화한 심정지 양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응급의료센터 박억숭 과장은 "과거에는 심근경색 등 심장질환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최근에는 호흡기 질환, 대사 이상, 약물 부작용 등으로 인한 '이차적 심정지'가 현장에서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고령층에서는 폐 기능 저하나 연하장애로 인한 기도 폐쇄가 심정지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동아대병원 응급의학과 정진우 교수 역시 "전기충격이 가능한 리듬의 비율이 감소하는 추세는 심장 외 원인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심실세동 등은 AED로 회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무수축(asystole)이나 무맥성 전기활동(PEA)은 호흡 부전·중독·감염 등 다양한 원인이 배경이어서 CPR만으로 자발순환 회복까지 이어지기 어렵다.

정진우 교수는 "CPR의 목적은 뇌와 심장으로 가는 혈류를 유지해 다음 단계 치료로 연결하는 것"이라며 "실제 회복은 제세동이나 원인 교정이 이뤄져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억숭 과장 역시 "산소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는 기도 확보나 약물 치료 등 원인 교정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즉, CPR은 필수적인 '연결 처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심정지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의식 없으면 CPR? 오처치 위험성도 존재
현장에서 보이는 또 다른 문제는 단순화된 대응이다. '의식이 없으면 CPR'이라는 인식이 일부 상황에서는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박억숭 과장은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는 사람의 가슴을 압박하는 것은 엔진이 돌아가는 차의 보닛을 망치로 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한 흉부 압박은 갈비뼈 골절, 폐·간 손상, 흡인성 폐렴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실신 환자나 뇌전증 발작 환자에 대한 오인 대응도 적지 않다.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신경과 조소영 전문의는 "발작은 심정지가 아닌 상태로, 대부분 심장과 순환은 유지된다"며 "이때 CPR을 시행하면 불필요한 손상 위험이 생기고, 머리 보호나 기도 확보 같은 핵심 처치를 방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일반인에게 '일단 CPR'을 권고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모든 상황에 정답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일반인이 현장에서 호흡과 맥박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지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에 가깝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시행 여부가 아니라, 심정지 여부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구분하고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CPR은 반응·정상 호흡 없을 때
그렇다면 CPR은 언제 시행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판단 기준이 명확하다고 말한다. 2025년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심정지는 '반응이 없고, 정상적인 호흡이 없는 상태'로 정의된다. 환자의 어깨를 두드려도 반응이 없으면서, 호흡이 없거나 헐떡이는 비정상 호흡만 보인다면 즉시 심정지를 의심한다. 이 경우 119에 신고하고 안내를 받으며 곧바로 CPR을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픽
그래픽=김민선
반면 실신이나 뇌전증 발작처럼 심장 박동과 호흡이 유지되는 경우에는 CPR 대상이 아니며, 기도 확보와 안전 확보가 우선이다. 기도 폐쇄, 저혈당, 출혈, 쇼크 등은 적절한 초기 대응만으로 심정지로의 진행을 막을 수 있는 대표적 상황이다. 박억숭 과장은 "기도가 막힌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CPR이 아니라 하임리히법이고, 저혈당 환자에게는 당분 공급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해외는 '예방 중심'… 한국은 이제 시작 단계
해외에서는 이미 응급처치를 '심정지 예방'으로 확장해 교육하고 있다. 미국심장학회(AHA)와 미국 적십자사는 CPR과 함께 실신, 쇼크, 천식 발작, 중독, 외상 등 다양한 응급처치 교육을 통합적으로 운영 중이다. 특히 미국의 'Stop the Bleed' 캠페인은 일반 시민에게 지혈 방법과 키트를 보급해 출혈로 인한 사망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반면 한국은 현행 제도상 CPR과 자동심장충격기(AED) 교육 비중이 높아, 실제 교육 역시 심정지 이후 대응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상황별·대상별 맞춤형 응급처치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억숭 과장은 "현재 교육은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동작만 강조되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교수 역시 "출혈에 대한 지혈, 위험 환경에서의 안전 확보 같은 기본적인 응급처치도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원리도 교육해 심정지 줄이는 사회로 나아가야"
전문가들은 응급처치 교육이 '어떻게(How)'에서 '왜(Why)'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과장은 "지금 교육은 기술 전수에 치우쳐 있고, 환자가 왜 쓰러졌는지를 판단하는 능력 교육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같은 의식 소실이라도 심정지, 실신, 발작, 저혈당에 따라 대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또한 교육의 지속성도 문제다. 대부분의 교육이 일회성에 그치면서 실제 상황에서 활용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응급처치는 반복 훈련과 이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확한 119 신고 역시 중요한 응급처치로 꼽힌다. 단순한 위치 전달을 넘어 환자의 상태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현장 도착 전 대응의 질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은 패러다임 전환이다. '심정지 이후 대응'에서 '심정지 이전 예방'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응급처치는 의료인만의 영역이 아니라,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적인 생존 역량이다. 전문가들은 "심폐소생술을 잘하는 사회를 넘어, 심정지 자체를 줄이는 사회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알아두면 생명을 살리는 응급처치 3가지]
① 하임리히법(기도 폐쇄)
기도가 막히면 말을 못 하거나 목을 움켜쥐는 '초킹 사인'을 보인다. 이때 환자 뒤에서 명치와 배꼽 사이를 안쪽·위쪽으로 밀어 올려 이물질을 배출한다. 기도 폐쇄는 수 분 내 심정지로 이어질 수 있어 즉각 대응이 중요하다.

② 지혈(과다 출혈)
과다 출혈은 저혈량성 쇼크로 이어질 수 있다. 깨끗한 천이나 거즈로 출혈 부위를 강하게 누르는 '직접 압박'이 기본이다. 가능하면 출혈 부위를 심장보다 높게 유지하면 도움이 된다.

③ 회복 자세(의식 소실 시)
의식은 없지만 호흡이 있는 경우에는 CPR보다 기도 확보가 우선이다. 환자를 옆으로 눕히고 머리를 약간 뒤로 젖혀 기도를 유지한다. 이후 즉시 119에 신고하고 호흡 상태를 관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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