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있어 존재한다는 '산악인 엄홍길'의 즐거운 산행
엄홍길은 '신들의 영역'이라는 히말라야 8000m가 넘는 봉우리 16좌를 모두 오른 기록의 소유자다. 세계 최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제1의 건강 비결이라는 그와 함께 삼각산(북한산의 옛이름으로 일제시대에 명칭 변경)을 찾았다. 진달래능선 바위에 걸터앉아 나눈 그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등산복 차림의 한 남자가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부지게 걷는 모습에 한눈에 산악인 엄홍길(49세)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자리한 삼각산 입구에서 만난 그는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인사도 잠시, 기자 일행이 운동화를 신었는지 확인한 그는 "30분 코스를 오를까요, 50분 코스를 오를까요?"라고 물었다. "50분 코스의 풍광이 더 아름답다"는 그의 말에 오늘의 산행 코스가 결정됐다. 백련공원에서 시작해 진달래능선까지 오르는 길이다. 가을을 시샘하는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의 첫째 날, 산악인 엄홍길과의 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히말라야가 선택한 단 한 사람
엄홍길은 매일 아침 산에 오른다. 주로 집 근처 삼각산을 찾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백련공원에서 시작해 진달래능선을 지나 대동문까지 갔다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데,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아주 바쁜 날이면 오늘처럼 백련공원에서 진달래능선까지만 빠른 걸음으로 갔다 온다.
"저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세요.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지 않나요? 자연을 보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 정신까지 맑아집니다. 특히 혼자 산을 오르면 사색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거나 인생의 길이 잘 안 보일 때 산에 오르면 '길'이 보입니다. 산이 인생의 길잡이이자 스승인 셈이지요."
일반인에게 산은 '운동' 혹은 '휴식'의 공간이지만 엄홍길에게 산은 '존재의 이유'다. 산이 있어 그가 존재하고, 그가 있어 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산에 올랐습니다. 산을 도전의 대상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도전을 통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산이 나를 받아줘야 오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산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순응할 때 정상을 내줬습니다. 1985년부터 2007년 5월 31일까지,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봉우리 16곳을 오르기 위해 자그마치 38번의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료 10명을 잃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의 힘과는 상관없는, 산이 나를 선택한 결과입니다."
1997년 안나프루나 등반은 그에게 가장 가혹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는 안나프루나 정상을 500여 m 남겨 놓은 지점에서 동료를 구하려다 로프가 발목에 감겨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었다. 발목이 덜렁덜렁한 상태로 2박3일 동안 줄에 의지한 채 울면서 얼음절벽을 기어 내려왔다.
"당시 어떻게든 베이스캠프까지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시 안나프루나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와 의지 덕분에 죽음의 지대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어요."
급히 귀국해 대수술을 받았다. 주치의는 걸어 다닐 수는 있지만 앞으로 산을 오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홍길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술 5개월 만에 삼각산 백운봉에 올랐고, 수술 10개월 만에 안나프루나로 향했다. 그를 두고 '정신병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4전 5기 끝에 드디어 안나프루나 등정에 성공했다. 엄홍길은 인류 역사상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8번째 사람이다. 그 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히말라야의 얄룽캉, 로체샤르 등 위성봉 2곳을 올라가면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으로 기록됐다.
"로체샤르를 오를 때는 산이 두려웠습니다. 그 동안 사고와 죽음의 공포, 동료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산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눈사태가 일어나겠다' '날씨가 좋겠다 나쁘겠다' 같은 자연의 변화, 기상의 변화를 미리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만큼 나 자신과의 싸움을 힘겹게 벌였던 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