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 인터뷰>
“암이 나를 정의하진 않아”
혈액암 극복 후 창업한 청년의 이야기
VOL.420 (화·수·목·금 발행)
2024-05-07

꿈을 향해 여러 도전을 마다하지 않던 대학생 시절, 암을 진단받은 한 남성이 있습니다. 공군 장교를 준비하고 있었고, 기후 변화에도 관심을 갖던 22살 청년의 꿈은 암이라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위기를 기회 삼아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마침내 지금의 삶에 이르렀습니다.


버킷림프종 3기를 극복한 정승훈씨./사진=신지호 기자


암 환자를 돕는 사회적 기업 윤슬케어 정승훈(34·서울시 마포구) 대표를 만나 이야기 나눴습니다. 햇빛이나 달빛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윤슬’은 하나보다 여러 개가 모여야 더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암 경험자를 위한 마음이 여럿 모이면 더 아름다운 투병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2011년 12월, 정승훈씨는 위경련 증상이 있어 내시경 검사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여름에 위염을 진단받았기에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때보다는 증상이 오래 지속돼 검사를 받아본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위 염증이 너무 심해 혈관이 다 보일 정도라서 내시경을 진행할 수 없다”며 대형병원에 조직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2012년 2월에 찾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암일 수도 있겠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위에 생긴 종양을 잘라내고 앞으로 식습관을 잘 조절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두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직 검사 결과, 혈액암이었습니다. 골수 검사, PET-CT 등 각종 검사를 받고 ‘버킷림프종 3기’를 진단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를 6회 받은 후 12월에는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습니다. 버킷림프종은 비호지킨 림프종에 속해 진행이 빠르고 공격적이며 합병증 발병 위험이 높습니다. 치료가 모두 끝난 뒤에도 2022년까지 10년간 정기검진을 하며 추적 관찰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재발이나 전이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정승훈씨>



-혈액암을 진단 받고 놀라셨을 것 같다?

“다행히 쉽게 좌절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크게 놀라거나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암 진단 후에는 흔히 다섯 단계의 심리 변화를 거친다고 하는데요. 저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의 단계를 건너뛰고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로 빠르게 넘어갔습니다. 주변에서는 ‘젊은 사람은 암도 더 잘 자라 예후가 안 좋다더라’는 우려의 말을 많이 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젊으니까 치료가 더 잘 되겠지, 회복도 더 빠르겠지 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앙이 있는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암으로 인해 이 땅에서의 내 삶이 끝나더라도 ‘다 계획하신 대로겠지’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직 제가 세상에 쓰일 일이 있다면 살리실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온전히 치료에만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암을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걸 좋아하던 자연과학 전공생이라 그런지, 제가 진단 받은 버킷림프종이라는 질병과 치료에 대해서 궁금했습니다. 당시 주치의 선생님께서 종이에 버킷림프종 정보들을 적어 주시면서 한 번 공부해보라고 하셨던 게 계기가 됐습니다. 각종 의료 사이트와 대학교 강의 자료 등을 뒤져서 어떤 치료를 받게 되는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투병 과정에서 힘든 건 없었나요?

“저는 암 진단이나 치료로 인한 고통보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마지막 치료였던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이 끝나고 약 1년 뒤에 목에 뭐가 만져지더라고요. 당시 암으로 인해 미뤄진 취업 준비를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었는데 ‘설마 재발을 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됐습니다. 급하게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재발일 수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곧바로 세브란스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우선 추적 관찰을 하자고 해서 1년 정도 경과를 지켜보면서 부어 있는 림프절 조직 검사를 시행했습니다. 다행히 재발이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재발에 대한 염려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건강관리에 소홀해져 밤샘 작업이나 음주 등 몸에 안 좋은 행동들에 무뎌지게 됐습니다. 모순적이게 들릴 수 있지만 건강한 삶을 살지 않으니 병원에 갈 때마다 검진 결과를 듣기 전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특히 치료 끝나고 4~5년 뒤가 가장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항암 치료 부작용을 줄여주는 약제가 맞지 않았던 점입니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증상을 잡아주는 항구토제가 듣질 않아 날것 그대로의 항암 치료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정말 정신력으로 치료를 버텼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과 거의 동시에 암을 진단받았죠?

“모든 치료를 마치고 체력이 원래대로 회복될 때 쯤 주위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큰 차이 없이 공부를 하고 학점을 따며 대학생활을 했었는데 어느새 상황이 이렇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회의 일원이 돼 경쟁하는 친구들 틈에 저 혼자만 정체돼 있더라고요. ‘과연 치료가 끝나고 내가 친구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걸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종이에 전부 적었습니다. 그 후,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자는 생각에 자격증을 따고 면접도 준비했습니다. 몇몇 면접에서는 ‘암 환자는 쉬어야 되지 않냐’, ‘재발 위험으로 인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책임질 거냐’ 등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만 무너지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도전했습니다. 카페 아르바이트, 방문 판매 영업사원, 보험 영업사원 등등 여러 경험을 쌓았습니다.” 


-창업하게 된 계기는? 

“여러 직업을 경험해보니 저는 제가 아는 유익한 걸 누군가와 나누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잘 맞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정수기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시절, 낮 시간에는 항암협회에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생겨 암 환자단체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암 환자들이 비슷한 문제에 대한 고충을 반복적으로 겪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암 환우 카페 게시판을 보면 글이 많이 올라오는데 몇 페이지만 넘겨봐도 비슷한 질문의 유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 질문, 내 상황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상황이 나한테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그리고 암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대부분 일회성인 경우가 많아 어려움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반복되기도 합니다. 제가 암 환자였을 때 필요하다고 느꼈던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윤슬케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윤슬케어의 주력 서비스가 ‘암 환자 동행 서비스’다?

“암 경험자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현재 암 환자에게는 위로와 공감을 건네는 활동입니다. 암 경험자가 이제 막 암을 진단받은 새내기 암 환자의 병원 진료에 동행하는 서비스입니다. 투병의 도우미이자 길잡이가 되어주는 겁니다. 병원에 가면 피검사며 각종 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기까지 대기 시간이 엄청 깁니다. 한두 시간은 기본, 진료가 늦어지는 날이면 서너 시간도 대기합니다. 암 환자도 힘들고 가족의 간병 부담도 늘어나게 됩니다. 이 시간 동안 선배 암 환자가 함께하면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보호자는 간병 부담을 덜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동행 서비스를 제공해드렸던 분들 중에는 가족 간 치료에 대한 의견 차이가 심해 갈등이 깊어 혼자 병원에 가야했던 환자도 있었고 병원에서 호스피스를 제안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홀로 고민하던 환자도 있었습니다. 동행 서비스를 이용하고 난 뒤 의료진이나 가족보다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동료 생존자에게 더 위로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이때 암 환자들만이 서로 메워줄 수 있는 공백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암 투병 환경이 바뀌어야 할까요?

“암 환자들의 투병 환경이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요즘은 암 투병 사실을 공개하는 ‘암밍아웃’ 환자들이 많아지면서 암에 대한 정보나 암 환자의 경험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버킷림프종을 진단받았던 때에는 소셜미디어에 ‘림프종’을 검색하면 강아지 림프종에 대한 글만 나올 정도로 암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에 알리는 게 흔한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치료나 암에 대한 이야기를 사회에 알릴 수 있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암 환자가 오롯이 부담해야 하는 치료비 부담도 줄어들었고요. 아직 완벽하게 바뀌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제 암 환자여도 괜찮다며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암 투병 이후의 환경이 더 개선돼야 할 것입니다. 암 경험자여도 충분히 사회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암 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보통 암 환자를 보살핌이 필요하고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라고 여깁니다. 일반인과 암 환자 간의 격차가 너무 커지게 됩니다. 우리부터라도 환자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난 환자니까 쉬어야 돼’, ‘난 환자니까 건강한 음식만 먹어야 돼’ 같은 제한을 두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습니다. 환자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환자인 시기가 있고 치료에 집중하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환자라는 제약 안에 가두지 마세요!”


/최지우 기자 cjw@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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