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여행기 ③]​ 안개비 속에서 절절한 세기의 사랑을 엿보다

  • 임호준 헬스조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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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8.11.08 10:41

    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 여행기 ③

    부드러운 안개비 흩뿌리는 골웨이에서의 첫 일정은 카일모어 성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어준 성은 폴라카풀 호수를 굽어보며 그림처럼 서 있다. 영원한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다. 두 주인공은 죽고 없지만, 성은 변치 않는 사랑의 증인이 되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카일모어 성에서는 아일랜드의 거친 바람마저 숨을 죽인다. 
    호수와 성
    폴라카풀 호수 곁에 자리한 카일모어 성./헬스조선 DB

    사랑의 성, 카일모어 성

    끼니마다 세계 최고의 별미를 먹는다면 과연 행복할까? 가끔씩 신 김치찌개나 고춧가루 듬뿍 넣은 라면이 먹고 싶지 않을까? 거지와 옷을 바꿔 입고 왕궁에서 탈출한 왕자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 같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절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면 나중엔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더군다나 무엇엔가 감탄하고 흥분한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피곤한 일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난 고요함 속에서 소홀했던 자기의 모습을 들여다 볼 기회인데 너무 압도적인 경관에 계속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좋은 여행이 아닐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전날 모허절벽 트레킹을 마치고 아일랜드 최대 관광도시 골웨이로 왔다. 눈을 뜨니 부드러운 안개비가 창밖에 가득하다. 오늘은 아일랜드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날. 트레킹 시간이 길지 않고 일정도 여유롭고, 무엇보다 골웨이에서 연박이라 짐을 쌀 필요가 없어 좋다. 그래 여행은 이래야 한다. 모든 것이 강약의 리듬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가슴을 꽝꽝 때리는 격동으로 채워진다면 난 이 여행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텔 문을 나서니 벌써 무드가 잡힌다. 가슴 절절한 아일랜드의 사랑이 안개처럼 차분히 온몸을 감싼다.

    교회 외부, 교회 안 ​
    카일모어 성 옆 작은 교회는 헨리가 죽은 아내를 위해 기도하던 곳이다./ 헬스조선 DB​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헨리 미첼은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면화무역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인 아일랜드 카일모어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그는 사랑하는 아내 마가렛의 생일 선물로 그곳에 아름다운 성을 지어 주었다. 앞으로는 폴라카풀 호수가 그림같이 펼쳐지고 뒤로는 가파른 산이 담장같이 대지를 품은, 배산임수의 명당이었다. 그러나 마가렛은 성을 선물 받고 6년 후 이집트 여행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헨리는 아내를 잊지 못해 성 옆에 작은 교회를 짓고, 아내만 생각하며 여생을 보냈다. 교회에서 조금 더 가면 마가렛과 헨리가 함께 묻힌 묘당이 있는데, 입구는 벽돌로 영구히 봉인돼 있다. 마가렛이 45세에 죽었고, 헨리는 36년 후인 85세에 사망했다. 면화무역으로 쌓아올린 막대한 재력으로 얼마든지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지만 36년간 헨리의 마음속엔 마가렛뿐이었던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저 멀리 동화같이 예쁜 성이 보인다. 안개인지 안개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촉촉한 대기를 통해 보이는 성은 더 신비로워 보인다. 세기의 사랑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까? 센스쟁이 영화감독이 연출이라도 한듯, 전날까지 그토록 불어대던 바람도 오늘은 없다. 마치 정지화면처럼 안개비가 온몸을 감싸온다. 성은 수리 중이어서 일부만 공개했는데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럼에도 성을 둘러보는 마음이 좋은 것은, 확실히 ‘스토리의 힘’ 때문인 것 같다. 성을 나와 동화 같은 교회를 구경하고 다시 묘당을 보고 성의 경계까지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맞이하는 고요함과 차분함이 좋다.

    묘당, 비석
    교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헨리와 아내 마가렛이 묻힌 묘당이 있다. /헬스조선 DB
    토탄 대지, 황무지의 축복(?)
    카일모어 성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코네마라 국립공원이 있다. 아일랜드는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그것이 토탄 때문이라는 설명은 이미 들었던 바다. 그 토탄 대지의 전형(典型)이라는 코네마라 국립공원 비지터센터에는 토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박물관이 있다. 2억 몇 천 만년 전 고생대의 마지막 시기에 무성한 나무는 모두 석탄과 석유가 됐는데, 그때 석유나 석탄이 되지 못하고 남은 것이 토탄이라는 설명이다. 습지나 늪지 등 물이 많은 곳에 퇴적된 나무들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토탄 형태가 되었다는 것. 이런 대지가 아일랜드에서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어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감자 외에는 곡식도 생산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일랜드 여행자는 자로 잰 듯 일정한 구역에만 나무가 자라고, 그 외엔 황무지가 펼쳐지는 ‘아일랜드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 3일간 갖고 있던 궁금함을 풀 수 있었다.

    토탄 대지 길
    발이 푹푹 빠지는 토탄 대지는 질척거려 보드 워크를 따라 걸어야 했다. /헬스조선 DB​

    비지터센터를 나와 토탄의 대지를 걸었다. 키 낮은 잡목, 잡풀, 고사리가 토탄 위 한 뼘 정도 덮인 표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질척한 곳이 많아 대부분 보드워크를 조성해 놓았다. 전날 걸었던 모허절벽 트레킹에 비교하면 편안한 산책 수준이다. 이곳 트레킹의 장점은 개방감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구불구불한 토탄 대지의 빛바랜 누런 색감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그곳에 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답답한 곳에서 살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시야를 온통 가로막는 아파트와 빌딩의 숲, 하늘마저 조각조각 나 있어 마음이 자꾸 급해지고 공격적이 된다.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내 마음을 구속하지 않는 이런 황무지에 와서 한 템포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을씨년스런 그 빛바랜 누런 색감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길에 골웨이 시내에 들렀다. 국내 한 방송의 ‘비긴어게인’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윤도현, 이소라, 유희열 등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버스킹을 해 유명해진 곳이다. 거리 양편에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 펍들은 대부분 길가에 테이블과 의자를 내어 놓았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버스킹을 하는데 그리 수준이 높아보이진 않는다. 아마추어들이 노래하는 곳에 국내 최고 가수들이 와서 버스킹을 했다니…. 약간 반칙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도 길가 테이블에 앉아 기네스를 주문했는데 너무 추워 금방 마시고 일어났다. 서양 사람들과 우리는 확실히 체질이 다른 것 같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서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가야겠다.

    박물관 사람 전시
    코네마라국립공원 비지터센터 내에는 토탄 대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전시한 박물관을 따로 두고 있다. /헬스조선 DB​
    ※ 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기는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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