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서울시의사산악회 총무

시산제에 간다는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강풍에 쓸려 눈 속에 파묻혀도 설레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그래도 새벽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일어나 햇반을 데웠습니다.

데운 햇반에 갖은 양념과 참기름 그리고 햄을 얹으니 훌륭한 주먹밥이 되었습니다. 산우들과 나누어 먹을 생각에 입이 귀에 걸리면서 사과를 썰었고 아껴두었던 캬라멜 치즈를 곁들여 박석진 서의산 회장님이 좋아하는 치즈 사과도 준비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한 압구정 공영 주차장에는 저보다 더 설레었을 회원 몇 분이 먼저 도착해 계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곧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박명하 서울시의사회장님이 나와서 배웅을 해 주시고,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와 그에 대응하는 각오에 대한 말씀을 자상하게 해 주셨습니다. 박명하 회장님과 박인숙 서울시의사회 고문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는 출발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시산제에 참석을 못하시는 분들과 현장에서 등록하시는 분들이 뒤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기념품으로 나누어 드린 앙증맞은 금잔을 다들 좋아하셔서 뿌듯했습니다.

대관령 마을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경, 황규석·이태연 서울시의사회 부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결의를 다시 다지고, 기념 촬영을 하고 산행을 출발했습니다.

그동안 내린 눈이 1미터 가량 쌓여 있었지만 우리 전에 다녀가신 수많은 산우들이 눈을 다져 놓아서 산행에는 불편이 없었습니다.

2주전 덕유산 백두대간 러셀을 하고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지치는 순간 산 반대편에서 올라온 처음 보는 산우들과 얼싸안고 서로 기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누구의 발자국이 뒷사람을 이렇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저를 더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얀 눈밭을 헤치고 국사 성황당을 지나 능선에 오르니 수많은 바람개비가 돌고 비록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지만 하얀 자태가 어릴 때에 접었던 수수깡에 끼인 종이 바람개비처럼 예쁘고 정다웠습니다.

김희섭 선생님의 긴 다리를 부러워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답게 올라갔습니다. 정상을 바라보는 건초지에는 밤새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 빛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비박을 했던 산우들이 파 놓은 구덩이가 보였습니다.

정상에 올라 구덩이 중의 하나에 신심 깊어 울뜨레야 간사인 박진용 선생님, 산중의 꼿꼿한 선비인 유승훈 선생님 부부가 모였습니다.

마라토너인 김갑수 선생님이 건네 준 육포를 선자령을 지키는 동네 개와 나누어 먹고, 어찌 저리 태평할까 하고 개 팔자도 잠시 부러워했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올해 아흔을 넘기신 정충남 서의산 고문님께서 황규석 선생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선자령 정상까지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올라오셨습니다.

제가 물을 건네자 상남자 처럼 벌컥벌컥 들이켜시더니 "아 시원하다" 하고 씩 웃으셨습니다. 어찌해야 저렇게 건강하실 수 있을까 하고 넋을 놓고 보았습니다.

정상에서 단체 촬영을 하고, 우리의 적토마이자 걸어 다니는 산 네비게이션 이창명 선생님이 황병산, 소황병산, 노인봉을 차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창명 선생님의 뇌는 우리와 다른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것도 잠시, 바로 하산길에 접어들었습니다.

평범한 냇물을 건너게 해 주던 나무다리도 너무도 높게 싸인 눈 덕택에 절벽 사이의 브리지가 되어 있었고 길과 표식이 파묻혀 결국 우리 일행 중의 두 분은 길을 잘못 들어 택시를 불러 시산제 장소로 오셔야 했습니다.

하산하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세 번이나 교차되어 힘이 들만도 한데, 눈에 눈이 부신 내 눈이 눈 나라의 풍경에 매료되어 힘든 줄 몰랐습니다.

모두 하산하기를 기다려 버스로 십분 거리에 있는 음식점으로 향했습니다. 시산제는 산을 바라보고 지내야 하지만 며칠 전 내린 눈에 시산제 장소가 얼어붙어서 조해석 전 회장님의 허락으로 실내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정상에 올라 기개를 떨치신 정충남 선생님께서 초혼문을 쩌렁하게 낭독해 주셨고 우리의 영원한 연대장인 연재성 고문께서 제문을 아름답게 읽어 주셨습니다. 모두 숙연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한 시산제였습니다.

시산제 중간에 먼저 산의 품에 안기신 서의산의 전 회장님인 故 김진민 선생님에 대한 추도식도 있었습니다. 연재성 선생님이 추도사를 하다가 눈시울이 붉어져서 말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故 김진민 선생님의 사모님인 손영은 선생님께서 분향을 하실 때에는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각 구의사회와 이윤수 의장님도 시루떡을 나누어 드시면서 서의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노민관 전임 회장님이 우리의 염원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소지를 함으로써 시산제가 끝났습니다.

시산제가 끝나고 조촐한 음식을 나누면서, 일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의업이라는 직업이 억울하게도 매도당하는 상황을 서로 위로하고, 우리의 의지도 다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의 공준택 선생님의 큰 목소리가 침울한 분위기에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반가운 산우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미련이 많이 남았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서울로 향하는 배려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의업이라는 강한 끈으로 서로 묶인 우리들을 확인하는 잊지 못할 갑진년 선자령 시산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