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성동구 갑 지역에서 이번에 당선되어 국회에 다시 들어가게 된 민주당 전현희 변호사는 원래 치과의사 출신이다. 그는 치대에 입학했던 첫 학기에 기초 생물학 과목을 수강해야 했는데 그게 대형 강의실에서 의예과 학생들과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님은 매번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출결 관리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었다. 전현희 의원이 불리는 순간이면 '히읗(ㅎ)' 음가가 '이응(ㅇ)'으로 약화 되고, 자연스럽게 연음 법칙이 적용되면서 이름이 다소 민망한 비속어처럼 들리기 일쑤였다. 일부 남학생들은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고 교수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셨던 것 같다. 당시에 웃느라 수업 분위기를 흐리던 의예과 학생 중 하나가 나였음을 고백하며 늦었지만 전 의원에게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한다. 본의 아니게 명랑(?)했던 출석 체크 시간 말고도 떠오르는 생물 과목의 또 다른 추억은 매시간 치르던 쪽지 시험이었다. 이런 종류의 간단한 시험을 '퀴즈(Quiz)'로 부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경상도분이셨던 교수님은 유독 "쿠이즈"라고 정확한 'qu' 발음을 강조하셨는데 젊은 시절 당신이 원래 영문과 지망생이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아무튼 '쿠이즈'는, "노세 노세 예과 때 노세"라는 소위 '예과송' 가락에 마냥 젖어 살고 싶었던 의예과생들에게 현실 자각 타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공포의 단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생물 과목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최신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하셨던 것 같다. 강의 중간중간 교과서 내용은 아니지만, 혁신적인 업적을 이룬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인용하시며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시려 무던히 애쓰셨다. 한 학기 짧은 기간이었지만 '쿠이즈'를 통한 생물학의 기본 지식 외에도 난 그분으로부터 과학자의 자세, 교육자의 자세를 배웠다. 본인이 몸소 보여주시는 것만큼 확실한 교육이 더 있을까. 이후 10여 년이 순식간에 흘렀다. 예과 1학년 때 내게 생물의 기초(Kimball Biology)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 곧 서울대학교의 박상대 교수님은 바쁘신 중에도 내 결혼식에 하객으로 오셨다. 세상 인연이 묘한 것이어서, 아내가 박상대 교수님 실험실에서 학위를 했기 때문이다. 온갖 옛날 자료를 시시콜콜 다 보관하고 계신다는 박 교수님이 과거 생물 시간에 치렀던 내 '쿠이즈' 답안지를 찾아보시려 했다고 말씀하셔서 잠시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국립기관에서 일하는 아내의 전공은 어떨 땐 '면역학'이라고 하고 어떨 땐 '분자생물학'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박상대 교수님 문하생으로서, 아내를 포함한 그분의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공 명칭은 '세포생물학'이 아닌가 싶다. 1967년 결성되어 올해로 창립 57회를 맞는 그분들의 모임 이름이 , 그러니까 '세포생물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내 덕에 명예 회원 비슷하게 그 모임에 발을 들인 나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여성 세우회 회원의 남편들과 '사위들의 모임'이란 의미의 '사우회'를 결성했다. 한글과 한자가 혼합된 '짝퉁' 분위기의 작명이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사위'를 '사우'라 하니 박 교수님은 금세 이해하셨으리라. '세우회' 혹은 '사우회' 모임에 나감으로써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거인, 박상대 교수님을 가까운 거리에서 종종 뵐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었다. 마침 교수님 댁이 지근거리라 명절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세배를 가기도 했다. 그때 찍어 둔 우리 애들 사진을 한 모임에서 박 교수님이 슬라이드로 보여주시며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박 교수님은 자신의 모든 제자들과 그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파악하고 계셨고, 때에 따라 꼭 필요한 인생의 조언을 해주셨다. 2016년에 박 교수님이 펴내신 란 책은 제자인 97명의 세우회 회원들 이야기를 본인이 직접 수집하셨던 자료를 토대로 정성스럽게 기술하신 책이다. 각각 자기 이름이 적힌 챕터를 읽다가 스승의 한없이 큰 사랑과 일생 지속되는 관심에 눈물짓지 않은 제자가 몇이나 있을까 싶다. 2024년 4월 20일, 87세를 일기로 박상대 교수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인사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져서 혼이 났다. 지식을 배운 것이라고는 40년 전 단지 한 학기 수업에 불과하지만, 이후 아내를 통해 간간이 이야기 듣거나 종종 뵙게 된 박상대 교수님은 이미 내 마음속에 인생의 사표(師表)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고에 내 마음도 뻥 뚫렸다. 샌디에이고의 명물인 델 코로나도(Del Coronado) 호텔은 1888년에 세워졌다. 붉은색 원형첨탑 아래로 하얗게 이어진 여러 층의 베란다가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주변 바다와 조화를 이룬다.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 의 촬영지로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수많은 유명인이 이 호텔에 묵으며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샌디에이고 대학(UCSD) 연수 시절, 난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꼭 이 호텔에 데리고 가 아이스크림을 사 주곤 했다. 그리고는 호텔에 있는 많은 볼거리 중 빼놓지 않고 정문 앞에 있는 40미터 높이의 큰 소나무를 소개했다. 호주령 '노르폭 섬(Norfolk Island)'이 원산지인 특별한 소나무. 가지가 수평으로 쭉쭉 예쁘게 뻗어 오늘날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인기를 끄는 품종이다. 190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소나무에 세계 최초로 전등이 매달렸다. 요즘에야 반짝거리는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트리 등(燈)이 워낙 흔하지만, 전기가 개발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등이 달린 소나무는 큰 볼거리였다. 나는 박상대 교수님을 생각하면 등불이 많이 달린 이 큰 소나무가 떠오른다. 박 교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대학과 연구소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계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거목이 버티고 있었기에 거기에 다시 빛을 내는 여러 등불이 걸릴 수 있었다. 그 어른의 생전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비록 미욱하지만 내 식솔들이 새로운 학문을 펼칠 수 있도록 틀을 만들고 그 틀을 지켜 줄 울타리를 세워보고자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