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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었다. 1883년에는 이집트와 인도에 발생한 콜레라의 원인균인 비브리오 콜레라균을 발견해 독일 의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쳤다. 미생물학의 기초를 확립한 이런 화려한 업적을 배경으로 1885년 베를린 의과대학의 교수가 된 그의 문하에는 각국의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코흐의 실험실은 19세기 말 세계 의학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승승장구하던 코흐의 연구도 한계에 부딪혔다. 코흐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 커다란 성과에 집착하던 그는 1890년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이 개발한 ‘튜버클린’이라는 물질로 결핵을 고칠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여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계의 언론이 열광했고 찬사가 쏟아졌다. 약의 효력이나 안전성이 확인되기도 전에 독일 황제가 코흐에게 훈장을 주었을 정도다. 곧 수천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튜버클린 치료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튜버클린은 폐결핵에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심지어는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코흐의 신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튜버클린 사태의 후 폭풍은 당초의 열광만큼 거셌다. 항간에는 코흐가 재혼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키 위해 거금을 받고 제약회사에 비밀 처방을 팔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악성 루머에 시달린 코흐는 결국 튜버클린의 제조법을 밝혔다. 튜버클린은 단지 글리세린으로 추출한 결핵균 성분일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튜버클린이 돈이 될 것 같지 않자 뒤늦게 처방을 공개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때마침 부인과 이혼하고 31세 연하인 18세의 신부와 재혼한 코흐는 도저히 예전의 평판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 후의 코흐는 별다른 과학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1905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1910년에 심부전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생전에 권위적이고 무뚝뚝하며 비사교적이었던 성격 탓에 장례식 역시 초라했다. 조문객 열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은 6분 만에 끝났다. 많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며 파리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평생의 경쟁 상대였던 파스퇴르의 장례식과는 사뭇 대조적인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