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질환 치료에 꼭 필요한 약인데… 한국에선 못 쓰는 이유

이미지
세계 뇌의 날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권도영 고려대 안산병원 신경과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사진=오상훈 기자
파키슨병, 뇌전증, 군발두통 등 뇌 질환 치료법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정작 환자들이 실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경제적 기반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신경과학회는 22일 ‘세계 뇌의 날’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열고 신경계 질환에서 나타나는 ‘치료 공백’ 해소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날 권도영 고려대 안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파킨슨병 치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국내에 도입되지 않은 치료제와 새로운 제형을 꼽았다. 파킨슨병은 장기간 치료 과정에서 약효가 떨어지거나 이상운동증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위장관 운동 저하로 약물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약을 복용해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자도 있다. 해외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흡입형·패치형·피하주사형 등 다양한 치료제가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용할 수 있는 약제가 제한적이다.

권 교수는 “해외에서 이미 수년에서 20년 이상 사용된 치료법도 국내에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낮은 약가와 경직된 약가 산정 체계가 원인 중 하나로 기존 약물과 성분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제형이나 전달 기술의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데다, 국내 약가가 낮아 제약사가 시장 진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환자들도 신약 도입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대한파킨슨병학회 조사에서 파킨슨병 치료·관리의 최우선 과제로 ‘신약 도입’이 꼽혔고, 하나만 선택하도록 했을 때는 65.7%가 해외 신약의 신속한 국내 도입을 선택했다.

이 같은 공백은 뇌전증 필수 의약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뇌전증의 가장 위급한 상태인 ‘뇌전증 지속 상태’는 5분 이상 발작이 지속되는 초응급 상황으로, 수분 단위의 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의료 현장에서는 필수 주사제 공급이 불안정해 표준 진료지침을 시행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기고 있다.

황경진 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 지속 상태에 사용되는 디아제팜과 페니토인 등 주요 약제가 생산·공급 중단을 겪었고, 대체 약제 역시 공급 중단이 예정된 상황”이라며 “환자가 오면 어떻게 치료해야 좋아지는지 알고 있지만 사실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황 교수는 “치료가 늦어지면 호흡부전과 중환자실 치료, 영구적 뇌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 필수 의약품을 별도로 관리하고 실제 생산 원가와 물류비를 반영해 약가를 보전하는 한편, 중앙 비축과 권역별 재고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게 황 교수의 설명이다. 아울러 공급 중단 사전 예고제와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제약사에 대한 인센티브도 필요하다고 했다.

젊은 남성들이 주로 겪는 군발두통에서는 산소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가 문제로 지적됐다. 군발두통은 주로 20~40대 남성에서 발생하며 극심한 통증이 반복되는 질환으로, 우울과 불안, 자살 충동까지 호소하는 환자도 있다.

조수진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신경과 교수는 “효과가 입증된 고유량 산소치료가 국내에서는 재택치료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고 있다”라며 “군발두통 환자가 고유량의 순수 산소를 흡입하면 5~10분 이내 통증이 호전될 수 있지만, 현재는 병원에서 산소치료를 받는 것 외에는 가정에서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군발두통 환자가 약 2만명 수준으로 수가 적기 때문에 정책적 관심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환자들이 산소치료를 위해 응급실을 찾거나 적절한 의료용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비의료용 산소를 사용하는 등 치료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택 산소치료가 가능해지면 불필요한 응급실 방문과 의료비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재택 산소치료를 위해 처방 대상 질환에 군발두통을 명시하고 신경과 전문의가 처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정 기간 신경과 전문의가 진단·관리한다면 오남용 가능성도 낮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뇌 질환 치료 공백을 줄이기 위해서는 신약 도입뿐 아니라 필수 의약품 공급망 안정화, 건강보험 급여 확대, 재택치료 제도 개선 등 환자가 실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 교수는 “필수 의약품 공급이 불안정하면 같은 질환으로 같은 시기에 병원을 찾아도 어느 병원에서는 치료를 받고 다른 병원에서는 받지 못하는 ‘치료의 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치료 지연은 환자의 중증화와 후유장애, 간병 부담을 키우고 결국 사회 전체의 의료비와 돌봄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