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리포트]
마지막을 집에서 맞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재가임종을 뒷받침할 의료와 돌봄 체계가 부족해 상당수는 병원이나 시설에서 생을 마감한다. 정부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확대하며 ‘살던 곳에서의 삶’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디자이너이자 대학 교수인 이나미 씨는 지난 2023년, 임종을 선고받은 90대 치매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117일을 함께했다. 그를 만나 재가임종의 현실에 대해 물어봤다.
“몇 시간 뒤에 갑자기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지난 2023년 어느 날, 이나미 씨가 잠에서 잘 깨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응급실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들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90대이며 치매를 앓아온 지 4년째였다. 이외에 특별한 병력은 없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도 없었다. 응급실에서 뇌 검사부터 온갖 정밀진단을 거쳐 마주한 결과는 급격한 ‘노쇠(老衰)’였다. 온몸의 신진대사와 장기 기능이 급격히 저하된 상태였고 심장 기능은 단 10%만 남아 있었다.
두 명의 의료진은 그의 아버지가 임종기에 접어들었다고 결론지었다. 갑작스러운 임종 선고 앞에서 가족들의 시계는 다급히 돌아갔다. 생전 아버지가 고수해왔던 뜻에 따라, 연명의료계획서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당장 일반 입원실을 구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병원 측 판단에 따라 가족들은 임종실로 들어섰다. 귀는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다는 의료진의 조언에 이 씨와 가족들은 돌아가며 평생의 감사와 진심을 토해냈다.
이 씨는 아버지가 스스로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압박골절로 약해진 근육을 키우기 위해 재활병원에 입원했던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보낸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며 “당시 병원에서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CPR) 같은 연명 치료에만 매달리다 온전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던 후회를 아버지 때만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 씨의 속내를 듣기라도 한 걸까. 임종실에서 사흘이 지난 뒤, 기적처럼 아버지의 의식이 다시 깨어났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도 잠시, 병원은 아버지의 생명 연장을 최우선 목표로 두기 시작했다. 자가 호흡과 영양 섭취가 부실한 아버지를 위해 콧줄(비위관) 삽입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 신장 기능마저 망가진 환자에게 강제적인 영양을 주입하는 순간, 몸이 붓고 숨이 가빠지며 즉각적인 투석 연쇄반응이 시작될 터였다. 무엇보다 콧줄을 한 번 삽입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신체적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다시는 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이 바란 건 인위적 생명 유지 장치 없이 최소한의 수분과 산소만을 평화롭게 공급받는 자연사였다. 이미 떠나갈 날이 기정사실화된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 동안 스스로가 가장 머물고 싶어 하는 공간에서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를 바랐다.
이 씨는 “아버지가 평소 가장 두려워하셨던 것은 혼자 남겨졌을 때 시설이나 병원으로 버려지듯 보내지는 것이었다”며 “익숙하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만큼은 가족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결정을 실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암 등 4대 질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문 호스피스 병동에는 갈 수 없었다. 집으로 가려면 퇴원 후 가정 내에서 수액과 중심정맥관을 관리해 줄 가정간호서비스가 필요했다. 병원은 더 이상 제공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며 퇴원을 권했지만, 정작 퇴원 후 필요한 가정간호를 연결해줄 방법은 없었다.
당시 이 씨는 다른 대학병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환자 본인이 병원에 직접 와야만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는 곳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만 방문이 가능하거나 자원 자체가 없다는 답도 들었다. 대부분은 ‘자기 병원 환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가정간호를 거절했다.
마지막 희망처럼 찾아간 곳은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이었다. 병원은 가정형 호스피스·가정간호팀을 연결해 수액과 중심정맥관 관리, 드레싱, 응급상황 대처 교육까지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가족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실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임종을 선고받았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117일을 더 보냈고,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씨는 자신의 사례가 운이 매우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재가임종을 도와줄 의료진을 만났고 가족들도 함께할 수 있었다”며 “누구나 집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선택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사회는 아직 아닌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나미 씨와의 일문일답
-병원을 떠나는 게 두렵지 않았나?
“가장 두려웠던 건 병원이 아니라 집에 아무것도 준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퇴원은 밤이었고 산소장비도, 수액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밤사이 응급상황이 생기면 결국 다시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겠다는 불안이 컸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가정 호스피스 간호사가 바로 방문해 수액과 처치를 시작했고,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밤새 미세한 숨소리 하나에도 온 가족이 가슴을 졸이며 새벽을 버텼던 게 기억난다.”
-가정 방문 간호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
“수액과 드레싱, 중심정맥관, 소변줄 관리 같은 전문 처치를 모두 맡았다. 환자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임종 시기를 판단했고 이상이 생기면 주치의와 바로 연결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의료기기 관리법과 응급상황 대처법을 교육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린 기억 때문에 아버지의 재가임종을 선택했다?
“아버지보다 5년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는 임종 전 압박골절과 부정맥으로 몸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다. 의료진의 권유대로 운동치료가 가능한 재활병원으로 전원했다. 병원에서도 ‘잘 드셔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만 했고, 나 역시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재활병원에 입원한 지 8일 만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던 구급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죽음을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때의 후회가 커서 아버지만큼은 익숙한 집에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집으로 모시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병원에서는 겁에 질려 있던 아버지 표정이 집에 돌아온 뒤 완전히 달라졌다. 몸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편안해지셨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느꼈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집으로 온 지 한 달 반쯤 중심정맥관이 막혀 응급실을 찾았다. 병상이 없어 복도에서 오래 기다렸는데 아버지가 다시 병원으로 끌려온 것을 무척 두려워하셨다.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괜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가장 컸다. 다행히 처치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돌봄을 이어갔나?
“세 딸과 사위들이 시간표를 짜 24시간 곁을 지켰다. 몸을 닦아드리고 체위를 바꾸는 간병뿐 아니라 함께 식사하고 음악을 듣고 사진첩과 일기를 읽어드렸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시간을 주기 위해 117일간 버티신 것 같기도 하다.”
-작고하시던 순간은 어땠나?
“임종 전날부터 바이탈 수치와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임종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간호사도 가족을 부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온전히 숨을 쉬는 데 집중하셨고 마침내 아주 차분하고 깊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세상을 떠나셨다. 숨이 멎은 직후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두려움이나 고통의 흔적은 전혀 없이, 마치 큰 과업을 완수한 사람처럼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표정이셨다.”
-임종 후 경찰 조사가 재가임종의 걸림돌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경찰과 119, 법의학 관계자가 방문해 자연사 여부를 확인했고,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사체검안서’를 발급해 주는 절차였다. 그 서류가 있어야 장례도 치를 수 있다. 미리 절차를 인지하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만큼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책으로 쓰자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족을 위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개인의 간병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가임종을 원해도 제도와 의료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오래 사는 것만큼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지도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몇 시간 뒤에 갑자기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지난 2023년 어느 날, 이나미 씨가 잠에서 잘 깨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응급실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들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90대이며 치매를 앓아온 지 4년째였다. 이외에 특별한 병력은 없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도 없었다. 응급실에서 뇌 검사부터 온갖 정밀진단을 거쳐 마주한 결과는 급격한 ‘노쇠(老衰)’였다. 온몸의 신진대사와 장기 기능이 급격히 저하된 상태였고 심장 기능은 단 10%만 남아 있었다.
두 명의 의료진은 그의 아버지가 임종기에 접어들었다고 결론지었다. 갑작스러운 임종 선고 앞에서 가족들의 시계는 다급히 돌아갔다. 생전 아버지가 고수해왔던 뜻에 따라, 연명의료계획서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당장 일반 입원실을 구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병원 측 판단에 따라 가족들은 임종실로 들어섰다. 귀는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다는 의료진의 조언에 이 씨와 가족들은 돌아가며 평생의 감사와 진심을 토해냈다.
이 씨는 아버지가 스스로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압박골절로 약해진 근육을 키우기 위해 재활병원에 입원했던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보낸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며 “당시 병원에서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CPR) 같은 연명 치료에만 매달리다 온전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던 후회를 아버지 때만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 씨의 속내를 듣기라도 한 걸까. 임종실에서 사흘이 지난 뒤, 기적처럼 아버지의 의식이 다시 깨어났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도 잠시, 병원은 아버지의 생명 연장을 최우선 목표로 두기 시작했다. 자가 호흡과 영양 섭취가 부실한 아버지를 위해 콧줄(비위관) 삽입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 신장 기능마저 망가진 환자에게 강제적인 영양을 주입하는 순간, 몸이 붓고 숨이 가빠지며 즉각적인 투석 연쇄반응이 시작될 터였다. 무엇보다 콧줄을 한 번 삽입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신체적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다시는 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이 바란 건 인위적 생명 유지 장치 없이 최소한의 수분과 산소만을 평화롭게 공급받는 자연사였다. 이미 떠나갈 날이 기정사실화된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 동안 스스로가 가장 머물고 싶어 하는 공간에서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를 바랐다.
이 씨는 “아버지가 평소 가장 두려워하셨던 것은 혼자 남겨졌을 때 시설이나 병원으로 버려지듯 보내지는 것이었다”며 “익숙하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만큼은 가족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결정을 실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암 등 4대 질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문 호스피스 병동에는 갈 수 없었다. 집으로 가려면 퇴원 후 가정 내에서 수액과 중심정맥관을 관리해 줄 가정간호서비스가 필요했다. 병원은 더 이상 제공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며 퇴원을 권했지만, 정작 퇴원 후 필요한 가정간호를 연결해줄 방법은 없었다.
당시 이 씨는 다른 대학병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환자 본인이 병원에 직접 와야만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는 곳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만 방문이 가능하거나 자원 자체가 없다는 답도 들었다. 대부분은 ‘자기 병원 환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가정간호를 거절했다.
마지막 희망처럼 찾아간 곳은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이었다. 병원은 가정형 호스피스·가정간호팀을 연결해 수액과 중심정맥관 관리, 드레싱, 응급상황 대처 교육까지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가족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실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임종을 선고받았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117일을 더 보냈고,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씨는 자신의 사례가 운이 매우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재가임종을 도와줄 의료진을 만났고 가족들도 함께할 수 있었다”며 “누구나 집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선택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사회는 아직 아닌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나미 씨와의 일문일답
-병원을 떠나는 게 두렵지 않았나?
“가장 두려웠던 건 병원이 아니라 집에 아무것도 준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퇴원은 밤이었고 산소장비도, 수액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밤사이 응급상황이 생기면 결국 다시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겠다는 불안이 컸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가정 호스피스 간호사가 바로 방문해 수액과 처치를 시작했고,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밤새 미세한 숨소리 하나에도 온 가족이 가슴을 졸이며 새벽을 버텼던 게 기억난다.”
-가정 방문 간호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
“수액과 드레싱, 중심정맥관, 소변줄 관리 같은 전문 처치를 모두 맡았다. 환자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임종 시기를 판단했고 이상이 생기면 주치의와 바로 연결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의료기기 관리법과 응급상황 대처법을 교육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린 기억 때문에 아버지의 재가임종을 선택했다?
“아버지보다 5년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는 임종 전 압박골절과 부정맥으로 몸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다. 의료진의 권유대로 운동치료가 가능한 재활병원으로 전원했다. 병원에서도 ‘잘 드셔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만 했고, 나 역시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재활병원에 입원한 지 8일 만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던 구급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죽음을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때의 후회가 커서 아버지만큼은 익숙한 집에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집으로 모시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병원에서는 겁에 질려 있던 아버지 표정이 집에 돌아온 뒤 완전히 달라졌다. 몸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편안해지셨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느꼈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집으로 온 지 한 달 반쯤 중심정맥관이 막혀 응급실을 찾았다. 병상이 없어 복도에서 오래 기다렸는데 아버지가 다시 병원으로 끌려온 것을 무척 두려워하셨다.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괜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가장 컸다. 다행히 처치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돌봄을 이어갔나?
“세 딸과 사위들이 시간표를 짜 24시간 곁을 지켰다. 몸을 닦아드리고 체위를 바꾸는 간병뿐 아니라 함께 식사하고 음악을 듣고 사진첩과 일기를 읽어드렸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시간을 주기 위해 117일간 버티신 것 같기도 하다.”
-작고하시던 순간은 어땠나?
“임종 전날부터 바이탈 수치와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임종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간호사도 가족을 부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온전히 숨을 쉬는 데 집중하셨고 마침내 아주 차분하고 깊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세상을 떠나셨다. 숨이 멎은 직후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두려움이나 고통의 흔적은 전혀 없이, 마치 큰 과업을 완수한 사람처럼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표정이셨다.”
-임종 후 경찰 조사가 재가임종의 걸림돌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경찰과 119, 법의학 관계자가 방문해 자연사 여부를 확인했고,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사체검안서’를 발급해 주는 절차였다. 그 서류가 있어야 장례도 치를 수 있다. 미리 절차를 인지하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만큼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책으로 쓰자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족을 위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개인의 간병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가임종을 원해도 제도와 의료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오래 사는 것만큼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지도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