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군부터 단계적 급여화가 현실적 대안"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주요국이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공적 보험 체계 안으로 편입하거나 약가를 낮추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 비만을 단순한 체형 문제가 아니라 당뇨병·심혈관질환·만성신장질환 등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하는 만성질환으로 보고, 장기적인 의료비 절감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위고비와 마운자로 등 비만치료제가 여전히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100% 비급여다. 정부는 오남용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의료계에서는 정작 치료가 꼭 필요한 중증 비만 환자들이 높은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美는 시범사업, 佛은 65% 급여… 日은 약가 25% 인하로 재정 관리
해외 주요국은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비만과 관련 합병증을 관리하는 치료제로 보고 공적 의료체계 안에서 관리하려는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건강보험국(CMS)은 오는 7월 1일부터 메디케어 파트 D 가입자를 대상으로 특정 GLP-1 치료제를 월 50달러(약 7만5000원)에 제공하는 '메디케어 GLP-1 브리지'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지원 대상은 BMI와 동반 질환 등 CMS가 정한 임상 기준과 사전 승인 요건을 충족한 환자이며, 정부는 18개월 동안 비용 효과와 활용 데이터를 축적한 뒤 향후 정식 제도 도입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위고비와 마운자로를 중증 비만 환자의 건강보험 급여 대상으로 편입했다. BMI 40 이상 또는 BMI 35 이상이면서 당뇨병·고혈압·수면무호흡증 등 동반질환이 있는 환자에게 보험 적용률 65%를 제공한다. 초기 처방도 비만 전문센터와 대학병원 의료진으로 제한해 치료가 필요한 환자 중심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오남용 가능성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비(非) EU 국가 중에서는 스위스와 영국도 일정 기준을 충족한 환자에게 위고비 보험 적용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건강보험 체계를 유지하면서 약가를 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본 후생노동성 자문 기구인 중앙사회보험의료협의회는 마운자로의 판매 규모가 출시 당시 예상을 크게 웃돌아 건강보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고 판단하고, '지속가능성 특례 가격조정'을 적용해 오는 8월부터 전 규격 약가를 25% 인하하기로 했다. 시장 확대에 맞춰 국가가 직접 약가를 조정해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관리하려는 취지다. 고려대 구로병원 가정의학과 남가은 교수는 "비만은 단순한 체중 문제가 아니라 당뇨병과 심혈관질환 등 다양한 합병증 위험을 높이는 만성질환"이라며 "미국과 프랑스처럼 비만치료제를 공적 보험 체계 안에서 관리하려는 움직임은 비만을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왜 못하나… 재정 부담과 비용 효과가 최대 변수
한국은 위고비와 마운자로 등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여전히 전액 비급여로 운영하고 있다. 병의원과 약국마다 가격이 달라 한 달 치료비가 수십만 원에 이르고, 같은 약이라도 의료기관별 가격 차이가 적지 않다.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급여 확대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GLP-1 계열 치료제는 장기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급여가 적용될 경우 단기간에 약제비 지출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 지난달 한국릴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마운자로(제2형 당뇨병 적응증) 급여 협상은 최종 결렬됐으며, 기존 GLP-1 계열 약물인 오젬픽 역시 약 15년 전 마련된 급여 기준이 최신 진료 지침과 임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실제 활용도가 낮다는 지적이 의료계에서 나오고 있다.
민간 보험에서도 비용 부담은 빠르게 늘고 있다. 마운자로 관련 실손보험금 청구액은 출시 초기인 지난해 8월 1361만 원에서 올해 4월 12억8520만 원으로 약 944배 증가했고, 청구 건수도 24건에서 3264건으로 136배 늘었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GLP-1 계열 치료제가 장기적으로 비만 합병증을 줄여 의료비를 절감할 가능성은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입증할 비용 효과와 재정 영향에 대한 장기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추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과 김경곤 교수는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쉽게 급여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재정 부담 때문"이라며 "국가 차원에서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약값이 충분히 낮아진다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비만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당뇨병이나 심혈관질환 같은 합병증을 치료하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규제보다 단계적 급여… "제도권 관리가 현실적"
정부는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오·남용 우려 의약품으로 지정하는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미용 목적 처방과 온라인 불법 거래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다만 전문가들은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처방 기준과 환자 관리 체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가은 교수는 "오남용 방지를 위한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지정만으로 근본적인 해결이 되기는 어렵다"며 "비만치료제는 의학적 평가와 추적 관리가 필요한 치료제인 만큼 처방 기준과 환자 교육, 부작용 모니터링, 장기 관리 체계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곤 교수도 "현재 비만치료제는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사실상 일반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있다"며 "건강보험 체계 안으로 편입되면 처방 기준을 명확히 하고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 오남용 관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면 급여와 전면 비급여라는 이분법보다, 치료 필요성이 높은 환자부터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단계적 급여화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고도비만이나 당뇨병·심혈관질환 등 합병증 위험이 높은 환자를 우선 대상으로 하고, BMI뿐 아니라 허리둘레와 동반질환, 치료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경곤 교수는 "최소한 현재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비만대사수술 적응증 수준만큼은 약물치료에도 급여를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약물은 문제가 생기면 중단할 수 있지만 수술은 한 번 시행하면 원상태로 되돌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남가은 교수는 "급여화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BMI뿐 아니라 동반질환과 합병증 위험, 기존 치료 반응, 지속 관리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단계적 급여화와 함께 명확한 처방 기준, 치료 효과 평가와 중단 기준을 함께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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