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주겠다” 해도 거절당하는 나라… 69세에 멈춘 ‘헌혈 시계’

입력 2026.04.17 09:20

18년째 그대로인 69세 헌혈 정년, 기대수명 84세 현실 못 따라가
혈액 보유량 '주의' 단계… "나이보다 건강 기준 도입 시급"
정부, '다회 헌혈자' 연령 상한 확대 추진

헌혈하는 사람
헌혈을 하고 있는 시민/사진=연합뉴스
69세 여성 A씨는 얼마 전 '마지막 헌혈'을 했다. 10년 넘게 분기마다 꾸준히 헌혈을 이어왔던 그는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만 70세가 된다"며 "만 69세까지만 헌혈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직 건강한데 나이 때문에 더는 못 한다니 아쉽다"며 씁쓸함을 드러냈다.

인공 혈액 기술이 여전히 상용화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수혈은 대체 불가능한 필수 의료 인프라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 사회의 '헌혈 시계'는 69세에서 멈춰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간한 '국민 삶의 질 2025'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3.5세다. 기대수명은 늘었지만, 헌혈 제도는 여전히 과거 기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저출생과 고령화까지 겹치며 혈액 수급 체계 전반이 흔들리고 있다.

◇헌혈은 줄고, 수혈은 늘고… '2.9일분' 위태로운 현실
혈액은 수입이 불가능하고 보관 기간도 짧아 사실상 국내 헌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혈액 수급 상황은 '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16일 0시 기준 혈액 보유량은 2.9일분으로 적정 기준(5일분)에 크게 못 미친다. 혈액관리본부 관계자는 "현재는 혈액 수급 위기 단계 중 '주의' 단계에 해당한다"며 "현장에서도 수급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혈액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구조 변화다. 저출생으로 핵심 헌혈 층인 10~20대 인구가 줄어든 반면, 고령화로 수혈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 헌혈 연령 구조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 주축이던 청년층 비중은 감소하는 반면, 중장년층 참여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혈액관리본부 관계자는 "10대와 20대 헌혈자가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과거에 비해 그 비중은 감소하는 흐름"이라며 "반면 30~60대 헌혈 참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69세 기준, 의학적 근거 부족"… '건강 중심' 전환 필요
현행 헌혈 가능 연령 상한은 만 69세다. 2008년 혈액관리법 개정으로 64세에서 69세로 상향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사이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3.5세(2023년 기준)까지 늘어났고, 중장년층 헌혈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의학적으로도 연령 기준의 타당성은 뚜렷하지 않다. 지샘병원 조영규 일반검진센터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만 69세를 혈액의 질 저하나 헌혈자의 위험도를 가르는 유의미한 기준선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같은 연령이라도 건강 상태는 개인마다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건강한 72세 성인이 건강이 좋지 않은 57세 성인보다 헌혈 위험이 더 낮을 수 있다"며 "고령 헌혈자의 혈액이 안전성이나 수혈 효과가 떨어진다는 근거는 전혀 없고, 헌혈자의 개별 건강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미 미국, 영국, 호주 등 주요 선진국은 연령 제한을 아예 없애거나, 정기 헌혈자에 한해 제한을 두지 않는 등 '건강 상태' 중심의 유연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도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고령자 헌혈이 가능하다. 조영규 센터장은 "우리나라는 검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표준화된 건강검진 결과를 연계하면 고령자 헌혈 도입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도 '정년 완화' 검토… 다회 헌혈자 중심 확대
정부도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본지 취재 결과 보건복지부는 최근 '헌혈자 선별 기준 개선 연구용역'을 완료하고, 이를 토대로 제도 개편을 검토 중이다. 혈액장기정책과 관계자는 "이전부터 꾸준히 헌혈해 온 다회 헌혈자를 중심으로 연령 상한을 높이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고령자의 신규 헌혈 진입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70세 이상이 처음 헌혈에 참여하는 경우 건강상 위험을 고려해 제한할 필요가 있다"며 "기존 헌혈자의 연령 상한을 확대하되 문진 기준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MZ는 '이벤트'로 유입, 중장년은 '예우'로 유지
중장년층 유지와 함께, 청년층 유입 확대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그동안 정부와 관련 기관은 기념품 제공, 아이돌 협업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청년층 참여를 유도해 왔다.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증정이나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 팝업스토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도는 실제로 일정 부분 효과를 냈다. 혈액장기정책과 관계자는 "이벤트의 가장 큰 목적은 생애 최초 헌혈자를 유입하는 것"이라며 "성수동에서 진행한 엔하이픈 행사 당시 생애 최초 헌혈자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헌혈은 한 번 경험한 사람이 반복 참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첫 경험'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벤트 중심 정책은 지속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헌혈 참여를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적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헌혈 참여를 구조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다. 대표적으로 '헌혈 공가 제도'가 있지만, 현재 공무원 중심으로만 제한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민간 확산은 더딘 상황이다. 혈액장기정책과 관계자는 "민간으로 확대되면 좋겠지만, 아직 공공기관에서도 충분히 정착되지 않은 상태"라며 "단계적으로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다회 헌혈자에 대한 건강검진 제공, 유공자 예우 강화 등 '헌혈이 존중받는 문화'를 만드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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