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명 데이터 기반 ‘예측 의료’하는 美… “한국도 방향 전환 시급”

입력 2026.03.31 18:13
발표하는 교수
서준범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사진=오상훈 기자
“미국은 1억2000만 명의 의료 데이터를 모아 응급실 입원 가능성까지 예측해내고 있어요. 이를 따라잡으려면 민간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국가 주도 연합 모델이 필요합니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기본의료 TF장을 맡은 서준범 교수(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는 최근 의료 인공지능의 흐름을 ‘완전히 다른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단순한 진단 보조 기술을 넘어, 의료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판 전환’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31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가 주관한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한국 의료는 기술적으로도, 시스템적으로도 뒤처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진단 보조 넘어 ‘시스템 혁신’ 단계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AI 시대 새로운 양극화에 대비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신설된 기본의료 TF는 국민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AI를 활용한 필수 고품질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지역·필수·공공의료 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서 교수는 의료 AI의 지난 10년을 ‘좁은 영역의 반복’이라고 평가했다. 폐결절 탐지나 당뇨망막병증 진단처럼 특정 과제 해결에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AI는 전문가의 일부 업무를 대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며 “진단·치료·관리 전 과정을 바꾸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3~4년 사이 상황이 급변했다. 트랜스포머 기반 기술과 거대언어모델(LLM)의 등장으로, 하나의 모델이 다양한 의료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파운데이션 모델’ 개념이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AI가 폐결절 진단 모델 따로, 당뇨망막병증 진단 모델 따로 존재했다면 파운데이션 모델은 영상, 검사 수치, 진료 기록, 음성 등 모든 의료 데이터를 한 번에 이해하고 답을 도출한다. 서 교수는 “이제는 의대를 졸업한 의사처럼 작동하는 AI 모델을 만드는 단계”라며 “작은 데이터로도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통합 데이터 경쟁… 미국은 이미 ‘예측 의료’
이를 위해서는 방대한 의료 데이터의 통합이 필수적이다. 서 교수는 AI 성능이 데이터 규모에 따라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스케일링 법칙’과, 예상치 못한 능력이 나타나는 ‘이머전트’ 현상을 언급하며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 미국의 전자의무기록(EMR) 기업 Epic Systems은 약 1억2000만 명 규모의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 발생은 물론 응급실 방문 가능성까지 예측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또 ‘코스모스’ 데이터 레이크에는 약 3억 명 규모의 환자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

반면 한국은 초기 의료 AI 분야에서 빠르게 성과를 냈지만, 최근 ‘대형 모델 중심’ 전환 흐름에서는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준범 교수는 “우리나라 대학병원 데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수백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며 “개별 병원이나 벤처 기업의 힘만으로는 글로벌 빅테크의 거대한 모델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구글이나 오픈AI에 종속되지 않는 ‘소버린 의료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공이 주도하고 산업계와 연구진이 참여하는 연합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공 주도 AI 전환이 의료 위기 해법”
한국 의료가 직면한 지역·필수의료 위기를 해결할 열쇠 역시 인공지능 전환에 있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고도화된 AI가 의료 현장에 투입되면 의사의 번아웃이 줄고 진료 효율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며 “원격 협진과 실시간 모니터링이 결합되면 환자 중심의 예방 의료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변화가 정착되면 현재의 지역 필수의료 위기 역시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지난 2월 보건의료 AI 고도화와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확보 등을 포함한 핵심 과제를 담은 ‘AI 행동계획(액션플랜)’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이번 액션플랜은 2026년 일정 시점까지 실제 의료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전략위원회가 단순히 계획안만 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지부 등 관계 부처의 실행안을 심의하고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녹여내 한국형 의료 AI 모델이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게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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