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의 전 세계적 박멸을 이끈 윌리엄 페기 전 질병통제에방센터(CDC) 국장이 지난 24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89세.
지난 26일(현지시각) 고인이 설립한 세계보건태스크포스(TF)는 페기 전 국장이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1936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페기는 어린 시절 약국에서 일하며 의학과 약학에 관심을 키웠다. 워싱턴대에서 의학을 전공해 25세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이후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에서 1965년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CDC에 합류한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 가운데 하나인 천연두 연구에 뛰어들었다. 천연두는 수 세기 동안 감염자의 약 3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20세기 약 5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상당수 역시 고름성 병변으로 인한 심각한 흉터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페기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예방접종 캠페인이 정착돼 천연두가 사라졌지만,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감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196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CDC에서 천연두의 세계적 박멸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CDC의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 책임자가 된 페기는 이른바 ‘포위접종’(Ring vaccination)으로 불리는 백신 전략을 개발했다. 충분한 백신 물량이 없는 상태에서 전 인구 접종 대신 확진자를 중심으로 접촉 가능성이 있는 주변 인물들을 추적해 집중적으로 백신을 접종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현장에서 신속한 역학 조사를 바탕으로 감염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고, 이후 에볼라 바이러스 등 공중보건 위기 시 백신 접종 전략으로 사용됐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페기는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CDC 국장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인류 역사상 마지막 천연두 감염 사례가 보고됐고,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의 완전 박멸을 공식 선언했다. 천연두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최초의 감염병이 됐으며, 그의 전략으로 수억 명의 생명이 구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페기는 이후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여받고, 2020년에는 천연두 박멸 계획 수립을 국제사회에 제안했던 소련의 보건 행정가 빅토르 즈다노프와 함께 미국 민간단체 ‘생명의미래연구소’의 ‘생명의 미래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모두 천연두 박멸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페기와 즈다노프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