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조선은 인터엠디(InterMD)와 함께 매월 정기적으로 주제를 선정해 '의사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인터엠디는 5만여 명의 의사들이 회원으로 있는 '의사만을 위한 지식·정보 공유 플랫폼(Web, App)'입니다. (편집자주)
‘4세 고시’, ‘7세 고시’로 불리는 조기 사교육 열풍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4세 고시는 영어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한 레벨 테스트를, 7세 고시는 초등학교 입학 전 유명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을 가리킵니다. 관련 사교육 시장 역시 덩달아 커졌습니다. 지난 6월 발표된 서울·경기 5개 지역 유아 대상 영어학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유아 사교육비는 연 3조2000억 원 규모에 달하며, 영어학원비는 월평균 약 154만 원이었습니다. 특히 서울 지역 유아 영어학원의 평균 교습시간은 하루 5시간 24분으로, 초등 저학년 수준과 맞먹는 시간입니다.
사회 각계에서는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 공교육 약화와 교육 불평등 심화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를 차치하고라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의 건강입니다. 창의성·놀이 능력·사회성 발달 등 영유아기의 핵심 발달 과정을 해칠 수 있습니다. 4세·7세 고시가 어린이들의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가로막는 일종의 범죄 행위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진료 현장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의사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정신건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의사 110명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아이 발달에 부정적 영향… "실제로 자주 접해"
의사 10명 중 7명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의사의 76.4%(84명)는 조기 사교육을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답했습니다. “우려스럽지만 일부 부모의 선택일 수 있다”는 의견은 20.0%(22명), “개인의 자유 영역이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7%(3명)에 그쳤습니다.
조기 사교육이 아동의 정신건강이나 정서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75.5%가 “그렇다”, 20.9%가 “어느 정도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답변은 3.6%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과한 교육이 애초에 발달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한 응답자는 “정서적 안정감을 길러야 할 시기에 경쟁 위주의 생존 방식만 가르치는 건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의사는 “자기 조절 능력이 미성숙한 아이는 과도한 학습 부담감 극복이 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부는 이를 “아동학대 수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응답자 110명 중 106명은 진료 현장에서 조기 사교육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호소하거나 학업 부담과 관련된 증상을 보이는 아이를 접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흔하게 관찰되는 정서적·행동적 문제는 ▲짜증·분노 조절 어려움(37.4%) ▲사회적 위축·대인 기피(18.5%) ▲우울감·의욕 저하(17.3%) ▲집중력 저하(16.0%) ▲수면 문제(9.5%) 순이었습니다. 일부는 섭식 장애, 틱장애 등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절반 이상(58.2%)의 의사들은 조기 사교육이 결국 아동기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의사 부모도 '놀이 중심 교육' 선호하나, 경쟁 분위기 여전
그렇다면 의사들은 실제 자녀 교육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솔직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48.2%)는 “기본 생활습관이나 놀이 중심 교육만 시킨다”고 답했습니다. 20.9%는 “영어·수학 등 선행학습을 일부 시킨다”, 5.5%는 “본격적인 학원 수업을 시킨다”고 답했습니다. “가급적 시키지 않는다”는 답은 22.7%였습니다.
의사들조차 사회 분위기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동료 의사들의 자녀 교육 방식에 대해 묻자, 가장 많은 응답(51.8%)이 “사회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경쟁적인 느낌이다”고 답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별적으로 시키는 편이다”(29.1%), “대체로 사교육을 자제하는 분위기다”(16.4%)는 의견이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조기 사교육이 저출산이나 부모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61.8%는 “매우 그렇다”고 답했고, 32.7%는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의사 93.6%, "제도적 보완 필요"
전문가 입장에서도 아이들에게는 과열된 교육보다 정서 교감과 놀이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의사들은 7세 이전 영유아기의 건강한 발달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모와의 애착 형성 및 정서적 교감(27.2%) ▲또래와의 사회적 상호작용(20.8%) ▲다양한 신체 활동 및 놀이 경험(20.5%)을 꼽았습니다. 이외에도 ▲기초 생활 습관 형성 및 수면 리듬(12.8%) ▲오감 자극 및 운동 능력 발달(10.7%) ▲안정되고 스트레스 없는 환경(7.7%)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응답자의 93.6%는 영유아 교육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조치로는 ▲부모 대상 양육 교육 확대(34.6%) ▲공교육 내 놀이·정서 중심 프로그램 강화(25.8%) ▲조기 사교육 규제 또는 기준 마련(24.2%) ▲지역 사회의 보육·놀이 공간 확대(13.7%) 순이었습니다. 기타 의견 중에는 “사교육을 무작정 제한하는 건 비현실적이다”며 “대학 입시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조기 교육 과열은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설문 말미에 마련된 자유 응답란에는 많은 의사들이 현재의 교육 현실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심각한 사회 문제다”,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돼야 한다”, “조기 사교육에 대해 경고하는 메세지가 나와야 한다” 등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한편, 한 응답자는 “아이를 잘 교육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다”면서도 “불안감을 해소해 줄 공교육 시스템이 부재하니, 사교육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 욕구를 억누르기보다 각 아이들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이끌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