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성핵상마비’ 신약 나오나… 국내 의료진, 개발 가능성 확인

입력 2025.03.23 09:04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미디어 라운드테이블

"임상시험 인프라가 다소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환자 1명당 6개월이라는 긴 투약 기간을 끌고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병의 진행 속도를 좀 더 늦출 수 있다는 소견이 나와 고무적이었다."

뇌에 통증을 의미하는 듯한 빛이 퍼지는 모습을 구현한 사진
국내 의료진이 진행성핵상마비 신약의 개발 성공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확인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보라매병원 신경과 이지영 교수는 지난 18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주최로 열린 미디어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이지영 교수가 공개한 연구 결과는 ‘진행성핵상마비(PSP)’ 신약 후보물질의 효능을 평가한 임상 2a상 결과다. 아직 임상 3상 시험이 시작되지 않아 당장 실제 허가 가능성을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연구 결과는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진행성핵상마비 신약 개발 성공 가능성을 높일 데이터를 확보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초기에 파킨슨병으로 자주 진단… 유병률 연구 부족
진행성핵상마비는 비정형 파킨슨 증후군으로, 주로 중뇌의 퇴행에 의해 발생하는 신경퇴행성질환이다. 파킨슨병처럼 질병 진행이 도파민 세포가 죽어 나가는 형태로 국한되지 않아 파킨슨병과 다른 병으로 구분되며, 평균 발병 연령은 63세다.

진행성핵상마비는 운 좋게 전문의에게 발견되지 않는 이상 초기에 파킨슨병으로 진단되는 사례가 많다. 증상이 파킨슨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진행성핵상마비의 가장 대표적인 초기 증상은 신체 균형 감각 이상으로 몸이 뒤로 넘어가거나 자주 넘어지는 것이다. 이는 파킨슨병 증상에 포함되는 6가지 징후 중 하나다.

진행성핵상마비는 유병률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질환이기도 하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신정환 교수는 "국내는 유병률 데이터가 없어 유추하기 어렵고, 해외의 경우 10만명 당 5~10명 정도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초기에 파킨슨병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있어 실제 진단보다 상당히 과소평가돼 있다"고 말했다.

◇아직 허가 약 없어… FDA 승인 時 20조 시장 독점
아직까지 진행성핵상마비 치료제로 효능을 입증한 약은 없다. 그동안 진행성핵상마비 환자들은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받았다. 운동·인지 장애를 개선하는 약물을 사용했고, 운동·인지 재활·식이요법 등 비약물적 치료를 받았다.

‘GV1001’은 개발 과정에서 노화와 관련 있는 항염증·항산화 작용이 주요 효과로 확인돼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로 개발 중인 펩타이드 약물이다. 개발사인 젬백스앤카엘에 따르면, GV1001은 신경세포가 사멸하는 조건에서 세포가 죽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효과를 나타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젬백스앤카엘 관계자는 "진행성핵상마비에 좋은 작용을 하는 약물들이 많이 연구 돼왔지만, 대부분 약물이 뇌-혈관 장벽(BBB)을 통과하지 못해 실제 개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며 "GV1001은 뇌-혈관 장벽을 통과할 수 있는 펩타이드 약물이다"고 말했다.

아직 진행성핵상마비 치료제로 허가된 신약이 없는 만큼, GV1001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얻을 경우 진행성핵상마비 치료제 시장을 독식할 가능성도 있다. 진행성핵상마비 치료제 시장 규모는 약 150억달러(한화 약 20조원)로 추정된다.

안경을 쓴 여성이 마이크를 들고 말을 하는 모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신경과 이지영 교수/사진=정준엽 기자
◇보라매병원 연구팀, 효능 입증 “유의미한 결과 확인”
이지영 교수 연구팀은 78명(평균 60대 후반)의 진행성핵상마비 환자들을 3개 집단에 무작위로 배정한 후, 각각 ▲GV1001 0.56mg ▲GV1001 1.12mg ▲위약 중 한 가지를 6개월간 매주 투약한 뒤 효능을 비교했다.

그 결과, GV1001 0.56mg 투여군은 위약군 대비 질병 진행이 116% 개선됐다. 주요 평가변수로 설정된 'PSP 등급 척도 점수' 변화량의 경우 GV1001 0.56mg 투약군은 0.82점 감소한 반면, 위약군은 5.19점 증가해 위약군 대비 유의성을 입증했다. PSP 등급 척도 점수는 더 높을수록 질병이 더 많이 진행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최초 투여 직전 측정한 PSP 등급 척도 점수 대비 6개월 치료 후의 점수가 개선되거나 유지된 환자의 비율로 산출된 '치료 반응률'을 평가한 결과, GV1001 0.56mg 투여군은 63.64%, 위약군은 25%로 집계됐다.

다만, GV1001 1.12mg 투약군은 아직 위약군 대비 일관된 개선 효과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 집단은 현재 12개월 연장 시험에서 추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지영 교수는 "미국·유럽에서 위약군과 유의미한 차이 없이 투약이 계속 진행되거나 안전성 문제로 시험이 중단된 사례는 많이 보고됐지만, 이번 연구처럼 중단 없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경우는 없었다"며 "허가 이후 여러 다른 약들과의 병용 투여 또는 비약물 치료 병행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이 연구 결과는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AOPMC(아시아·오세아니아 파킨슨병·운동장애학회) 런천 심포지엄에서도 공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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