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불안 너머 울분까지…한국인 60%가 '만성울분'

입력 2021.04.22 17:08

불공정·부패가 주요 원인… 약도 없어 치료 잘 안돼

한 남성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국민 절반 이상이 ‘만성적 울분’을 겪고 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생각할 때마다 화나는 일이 있는가? 그 일을 유발한 대상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결국 어떤 노력을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외상후울분장애(PTED)’일 수 있다. 당신만 유독 울분이 많은 게 아니다. 한국인 10명 중 6명이 만성울분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르는 사이 꽤 깊게 심어진 울분. 이렇게 방치해도 괜찮을까?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국민 절반 이상, 울분에 차있어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학과 보건정책관리학전공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지난 21일 ’2021년 한국 사회의 울분 조사' 주요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4일부터 26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1478명을 대상으로 웹 설문을 한 결과 58.2%가 만성적인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해 대비 10.9%p 상승한 수치다.

유명순 교수는 “울분은 정의에 크게 어긋나고 부당한 일로 고통을 겪어 세상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훼손되면서 겪는 감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정적인 영역에 있는 울분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 걸까? 유명순 교수는 독일 베를린 카리테 병원 정신재활센터 린든 교수가 개발하고 고대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창수 교수가 정리한 한국어판 ‘외상후울분장애(PTED) 자가측정도구’를 사용했다. 다시 말해, 국민 절반이 PTED에 노출돼 있다는 뜻. 이 질환은 1990년 독일에서 처음 학문적으로 정리한 개념이지만, 최근 국내 정신건강의학계에서 더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울분을 느끼는 사람은 독일보다 한국에 더 많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PTED 자가측정도구(기사 하단)는 지난해 동안 심하게 스트레스 받는 일을 묻는 19개 문항으로 구성돼 있다. 중간 울분과 심한 울분을 합쳐 만성적인 울분으로 본다.

한편, 이번 해 국민 울분이 증가한 원인으로는 연구팀이 사안별로 조사한 결과, 사회·정치적 불공정 사안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2년 전 5위였던 ‘정치·정당의 부조적과 부패’가 울분을 느끼는 이유 1위를 차지했다. 이번 해 울분 점수가 높아진 주요요인으로 볼 수 있다. 유명순 교수는 “울분의 부정적 건강 영향이 계속 확인되는 만큼,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위한 긍정, 인정, 공정의 역량을 키워 울분을 줄이고 예방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PTED에 대한 사회적 논의 시급해
외상후울분장애(PTED)를 방치하면 방화, 자살, 폭력 등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어 사회적 관심이 시급하다. PTED는 질환 명에 ‘외상후’라고 나와 있는 것처럼 어떤 특정하고 명확한 상황이 닥친 후에 생기는 감정을 6개월 이상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질환인데, 보통 해고, 이혼, 파산, 가까운 이의 사망, 불치병 진단, 전염병 등 충격적인 상황이 원인이 된다. 어떤 사건이 정당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자신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으로 느껴지면 울분, 분노의 감정과 함께 자기비하, 무력감, 패배감 등이 따르게 된다. 사건이 계속 떠오르고, 복수의 감정도 생겨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을 유발할 수 있다. PTED를 방치하게 되면 극단적으로 표출되지 않더라도, 환자 개인은 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고대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철민 교수는 “PTED를 방치하면 자기비하, 충동조절의 어려움, 자살충동 등 그 자체로 고통을 받는 것은 물론 대인 관계, 직업생활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울분장애는 우울증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약으로도 잘 치료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PTED는 선후관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우울장애에 동반되기도 한다. 고대 안산병원 이승훈 교수 연구팀은 우울증 중증도가 증가하면 PTED 증세도 증가했다며, 우울증선별도구(PHQ-9) 점수가 PTED를 60%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PTED 발병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신철민 교수는 “지금은 피해를 헤쳐 나가느라 바빠 울분장애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며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1년 내에 울분장애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10~20% 증가할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미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우울과 불안을 너머 분노를 표출하는 상태인 ‘코로나 레드’가 PTED의 증상과 비슷하다. 강제로 영업을 중단하게 된 사업가, 부득이하게 격리하게 된 접촉자, 지나치게 길게 입원하게 된 환자, 코로나19로 취업이 잘 되지 않는 청년층 등이 PTED 고위험군이다.

◇부정적인 감정 풀어내려 노력해야
PTED 치료는 약물과 인지행동요법 등 정신치료를 병행한다. 약물로 뚜렷한 차후가 보이는 우울증과 달리 울분은 항우울 약물 치료 후에도 남아있을 수 있어, 정신치료적 접근이 시도돼야 한다. 인지행동 치료는 다양한 부당한 사례를 상상해보고 부정적인 감정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연습해보는 치료다.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서은 교수는 “개인의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적절히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려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운동, 음악, 산에 올라 소리지르기, 천천히 호흡해보기, 억울한 심정 글로 써보기 등 자신에게 맞는 해소법을 찾는 게 정신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철민 교수는 “PTED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적합한 치료를 제공하면 되지만 울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사회 전체 구성원의 참여가 필요하다”며 “사회에 모든 종류의 차별과 불합리, 부당한 권력 남용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PTED 자가 진단 척도
1. 특정 일으로 감정에 상처를 받고 상당한 정도 울분감을 느낀다.
2. 특정 일이 내 정신건강에 눈에 띄게 심하고 지속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준다.
3. 특정 일이 내가 보기에 아주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하다.
4. 특정 일이 자꾸 반복적으로 생각난다.
5. 특정 일을 생각할 때마다 아주 많이 화가 난다.
6. 특정 일로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7. 특정 일로 나 스스로 탓하게 되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8. 특정 일에 대해 결국 어떤 노력을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느낀다.
9. 특정 일이 나 스스로를 아주 우울하고 불행하게 한다.
10. 특정 일이 나의 전반적인 신체 건강을 해치게 한다.
11.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어떤 특정 장소나 사람을 회피하게 한다.
12. 특정 일이 스스로를 무기력하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13. 그 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내가 당한 일과 비슷한 일을 똑같이 당하는 것을 상상하고 나면 만족스럽다.
14. 특정 일이 나의 기력과 뭔가를 할 의지를 많이 줄어들게 한다.
15. 특정 일이 이전보다 나를 더 예민하게 한다.
16. 특정 일이 결국 나 자신이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기 힘들게 한다.
17. 특정 일이 내가 직업이나 가정에서 이전처럼 활동할 수 없도록 한다.
18. 특정 일이 나를 친구 관계나 사회 활동에서 더 위축되게 한다.
19. 특정 일이 내게 아픈 기억을 자주 떠올리게 한다.

*지난 1년간 위 항목에 해당되는지 체크
*전혀아니다(0), 거의 그렇지 않다(1), 약간 그렇다(2), 많이 그렇다(3), 아주 많이 그렇다(4)
* 각 항목의 점수 총합을 19로 나눠 산출.
▲1.6점 미만: 이상없음 ▲1.6이상: 경증·중등증 ▲2.5이상 :심각한 울분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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