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역사·음식…자연의 품에 안기다

힐링 스토리
통영 가는 길 - (上) 함양·산청 편

아직은 설익은 노을빛 초가을 하늘은 살랑살랑 부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심심한 사람의 마음을 한껏 흔들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여행이고, 이런 날 떠오르는 여행지가 바로 통영으로 가는 바다백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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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통영 앞바다

통영으로 가는 길, 가을을 만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새로 생긴 커피전문점이 있어 생각 없이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문득 ‘가을이 오는구나’와 함께 ‘올해가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편이 진한 커피 맛보다 더 씁쓸해졌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휴가를 내고 하늘과 바다가 있는 경상남도로 여행을 떠났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 아니던가. 당연히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하고, 자연이 선사하는 감동도 느껴야 한다. 더불어 그것을 토대로 살던 사람들의 진한 삶도 느끼면서, 메모지 한 장에 무언가를 끄적일 수 있는 문학적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곳이 바로 한려수도 통영이다.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예술의 도시, 통영으로 떠난다.

통영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가 있지만, 서울 및 수도권에서 오고 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KTX 고속철도를 타고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통영으로 가는 KTX 기차역은 진주역이 가장 가깝지만 가을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함양과 지리산에 포근히 안겨 있는 산청을 빼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여행은 KTX 대전역에서 내려서 첫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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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령사가 매화꽃이라면 가을의 전령사는 바로 꽃무릇이다.

뼈대 있는 선비의 고장, 함양

‘꽃무릇을 보지 않고 가을이라고 말하지 말라.’ 가을을 대표하는 꽃, 꽃무릇을 보고 안도현 시인은 산문집《안도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을 여행 하면 항상 단풍을 생각한다. 봄의 전령사가 매화꽃이라면 가을의 전령사는 바로 꽃무릇이다.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에 있는 함양, 함양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숲이 따로 있다. 바로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상림공원이다. 상림공원은 신라 말 태수로 오신 천재학자 최치원 선생이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으로서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운치 있는 누각과 함께 어우러진 천년의 숲이다. 가을의 문턱, 그곳은 꽃무릇이 한창이다.

천년의 숲, 상림은 마을 사람들의 보물처럼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상림공원 옆을 흐르는 위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뜻하게 단장한 물레방아가 있다. 이곳에서부터 고운숲길이 시작된다. 고운숲길에 들어서면 양옆에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꽃무릇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함양 역사인물공원,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손 없이 발견된 이은리 석불, 함화루, 함양 척화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렇게 천년의 숲 여행을 마치고 나오면 무더운 여름에 피는 연꽃과 수련이 가득한 연지가 있고, 그 주위에서는 가을마다 열리는 함양 산삼 축제와 물레방아골축제가 한창이다.

잠시 축제를 둘러보고 함양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함양의 맛집으로 향했다. 수수, 차조, 찹쌀, 보리 등으로 지은 오곡밥과 함께 푸짐한 꽃게와 큼지막하게 썰어넣은 두부가 들어간 뚝배기 된장찌개, 싱싱한 채소와 담백하게 삶아 나온 보쌈, 그리고 매콤한 더덕구이, 정갈한 나물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 다음 여행지인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로 나섰다.

함양 8경 중 1경이 먼저 다녀온 상림사계라면 지금 가는 곳은 함양의 4경 화림풍류다.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 할 정도로 함양은 양반의 고장이자 국내에만 195개 정자가 있는 정자문화의 메카이기도 하다. 특히 화림동 계곡은 덕유산과 월봉산, 거망산,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금천을 이루면서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멋스러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마치 함양이라는 미술관에서 산수화 컬렉션을 파노라마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금천은 남강의 상류에 있어 기암괴석 주위로 곡류하는 힘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강력하다. 암석 위 계곡물을 보고 있노라면 발을 담그기 무서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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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곡류에 세워진 정자를 중심으로 걷는 선비문화탐방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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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곡류에 세워진 정자를 중심으로 걷는 선비문화탐방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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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곡류에 세워진 정자를 중심으로 걷는 선비문화탐방로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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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곡류에 세워진 정자를 중심으로 걷는 선비문화탐방로④

가을에 걸어야 제맛, 선비문화탐방로

이번 여행에서는 저 멋진 화림동 곡류에 세워진 정자를 중심으로 조성된 선비문화탐방로를 걸었다. 선비문화탐방관이 있는 거연정에서 군자정, 동호정, 황암사를 거쳐 농월정이 있는 농월국민관광 단지까지 총 거리 6km, 2시간 남짓 소요되는 길이다. 장마가 지나고 가을비가 내린 후라 계류의 수량이 굉장히 많이 불어 있었다. 우거진 숲을 지나 계곡물 위로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 자연 암석 위에 살포시 올라앉아 있는 학을 닮은 거연정에 앉아 주변 풍광을 감상해 보았다. 옛 선비처럼 멋진 시 한 수가 저절로 나올 것 같은 멋진 정자였다. 잠시지만 선비들의 풍류를 체험해보고 탐방길에 올랐다. 탐방길은 나무 데크로 잘 꾸며져 있었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걸을 수 있는 부담 없는 길이다. 숲속으로 들어가니 금천의 계류 소리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새 소리가 하모니가 되어 자연 속 힐링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길이었다.

거연정과 군자정을 지나 붉은 사과밭이 많은 다곡마을을 지나면 동호정이 나온다. 동호정 앞 멋진 계류가 흐르는 암석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간식도 먹으면서 지나친 사과밭 이야기를 했다. 주인 없는 사과밭에 사람을 대신해 반짝이는 곰 인형과 새 혹은 다른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설치해둔 방지물이 있는 것을 보며 ‘예전의 시골이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다.

다시 길을 잡아 금빛으로 누렇게 익고 있는 고개 숙인 논길을 지나다 보면 남덕유산 자락의 황석산(1190m)과 대봉산(1252m)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호성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여행객의 손길을 유혹하는 함양의 특산물 대봉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곳이다. 맑은 공기에 말리는 함양 곶감을 만드는 공장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내 화장실 앞까지 침범한 감나무 가지의 유혹을 보면서 왼손이 오른손을 잡고 지나가야 하는 고난의 길이다.

마을까지 넘어온 계곡의 물길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숲에 들어설 때 황석산 넘어 남덕유산 자락이 보이는데, 신선들이 구름타고 내려온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소나무숲을 지나면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싸우다 순국한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황암사(사당)이 있다. 황암사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마지막 도착지인 농월정에 도착한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라는 농월정, 이름마저 풍류스러운 농월정은 화재 이후 12년 만에 복원한 탓에 고즈넉한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정자 옆 붉은 백일홍과 함께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너럭바위 월연암, 그리고 그 위로 미끄러지며 흘러가는 풍족한 맑은 녹수, 그 물길 따라 깊게 파인 담을 보면서 함양을 찾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왜 이곳을 필시 거쳐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함양 내 삼동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자연의 미를 간직한 화림동 농월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길 이름을 보고 심심하거나 너무 쉬울 줄 알았는데, 이름과는 다르게 스릴 있는 길이었다. 삼림욕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데크길과 화전처럼 꾸며진 자그마한 마을, 계곡물이 넘치는 계곡길, 향긋한 소나무 숲길까지 지루할 틈이 없는 시간이었다. 트레킹을 마친 후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찾아간 곳은 농월정에서 차량으로 40분 거리에 자리한 자연 그대로의 마을, 산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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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약선전문식당 '동의약선관'

힐링 《동의보감》의 고장, 지리산 마을 산청

산청은 전 세계가 인정한 유네스코에 등재된 동양 최고의 의학서이자 베스트셀러인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과 관련 있는 곳이다. 또한 드라마 <허준>에서 스승으로 나온 신의(神醫) 류의태의 실존 인물인 조선의 명의 신연당 유이태 선생이 의술 활동을 펼치던 곳이기도 하다.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 2013년 산청 세계 전통의약엑스포가 열린 산청 한방 테마파크로 이동했다. 도착하고 보니 이곳은 그냥 테마파크가 아니었다. 한방과 관련된 모든 시설이 모여 있는 집합체로 산청한방가족호텔, 한옥스테이, 동의본가, 한의원, 휴양시설, 워터파크 및 한방체험을 할 수 있는 산청약초관, 동의약선관, 한의학박물관, 약초생태관, 자연휴양림 및 테마길 등 다양한 시설이 있는 곳이었다.
저녁식사하기 전 한방 기 체험장을 방문했다. 왠지 기가 다르다고 느껴졌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기가 제일 좋은 장소란다. 백두대간이 지리산까지 내려오는 길 중 제일 끝자락에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는 기를 받을 수 있는 돌이 3개가 있는데 하늘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석경’, 땅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귀감석’, 그리고 복을 받고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복석정’이다. 귀감석에 가서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대었는지 별도의 안내가 없어도 돌 주변이 반질반질했다. 한참을 기대고 손을 비비다보니 어느새 몸에서 열이 나는 듯해 신기했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복석정으로 방문했더니 안내판에 이참 사장도 이곳을 방문하고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더 열심히 돌에 기대어 기를 받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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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약선관'의 음식

지리산이 선사해준 자연의 건강함

약선 전문 식당인 동의약선관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입구에서부터 몸에 좋은 냄새가 진동한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정갈한 그릇들 위에 한국화처럼 알록달록 아름다운 음식들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산양삼, 삼채, 흑마늘과 마구이, 블루베리가 들어간 샐러드와 도라지꽃이 장식된 호박찜, 해초 묵무침과 도라지정과, 목이버섯와 은이버섯, 비트로 물들인 연꽃을 닮은 양파와 당귀쌈무, 알 청국장, 더덕구이, 산삼 배양근, 방풍잎에 싸인 은행 열매, 소고기 갈비찜, 수육 등 몸에 좋은 음식들이 가득한 약상이었다.

산청의 이름에 걸맞게 음식 하나하나가 자연이었고, 내 몸을 살리는 건강한 밥상, 치유의 밥상이었다. 몸에 좋은 음식으로 힐링하고 숙소인 산청한방가족호텔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동의약선관에는 기 체험장과 연결된 약초가 자라고 있는 산비탈 사이로 잘 꾸며진 길이있다. 바로 허준 순례길이다. 순례길 옆으로는 잘 꾸며진 나무데크길이 있다. 몸에 좋은 지리산 약초 향기도 즐기고, 드라마 <허준>에서 스승을 해부하는 장면을 촬영한 동굴도 보면서 호텔에 도착했다. 산청 가족한방호텔은 얼마 전 새 단장을 해 방문하는 모든 여행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조용한 지리산 자락에 안겨 있는 산청한방가족호텔의 넓은 창 밖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산 전체에 펼쳐져 있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맑은 공기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가득 숨을 쉬어보았다.

“아… 내가 언제 서울에서 이렇게 마음껏 숨을 쉬어보았나.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이구나.”

눈부신 지리산 일출로 자연스럽게 시작된 아침, 오늘은 통영으로 떠나는 날이다. 덕유산 남쪽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자락에 있는 마을, 함양과 산청. 출발하는 버스 창 밖 사이로 보이는 함양과 산청의 모습은 전설 속에 나오는 곰처럼 순박하면서 거대한 마을이었다. 현재를 사는 도시에서 자연과 인간을 두고 주객을 따지라면 한 번쯤 방향성에 혼돈이 온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정확하게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산천초목, 그 안에서 모나고 두드러지지 않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역사가 만들어놓은 정자에서 벼슬보다는 학문과 도덕을 중시하던 선비들의 모습과 자연과 전통을 중시하면서 현재까지 사는 이곳 사람들의 정신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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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지리산 자락에 안겨 자연 속에서 편안함 쉼을 선사해준다.

* 글을 쓴 성혜욱 가이드는 헬스조선 비타투어의 국내 여행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진행하는 국내 여행 전문 가이드다. 성혜욱 가이드의 통영 여행기는 2회에 걸쳐 연재한다. 12월호에는 ‘통영·거제 편’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