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미국 와인 1번지 캘리포니아를 가다
미국 와인 전체 생산량의 85%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주가 사상 최악의 산불로 고통받고 있다. 화재 피해는 고급 와이너리가 몰려 있는 북부지방 소노마와 나파 밸리에 집중돼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연기와 그을음에 다량 포함된 휘발성 페놀 성분은 포도 품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스모크 테이트’ 현상을 일으킨다. 과연 2017년산 캘리포니아산 와인은 제대로 맛볼 수 있을까. 소노마 카운티 행정 중심지인 산타로사에서 일등품 부르고뉴 스타일 와인을 생산하는 ‘월터 핸젤(Walter Hansel)’ 와이너리를 찾았다.
지난 10월 중반 캘리포니아주 산불이 기승을 부리던 시각, 샌프란시스코에서 101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피해가 가장 심한 소노마카운티 지역에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는 시커먼 연기 기둥이 피어 올라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정작 산타로사 서쪽 방향 인 터체인지를 빠져나가자 캘리포니아의 청명한 가을 하늘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 사거리 신호등이 끊기고, 간간이 소방차가 지나기는 했지만 다급한 사이렌 소리는 없었다. 산불은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동쪽 지역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첫 빈티지 와인 1998년에 생산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월터 핸젤 와이너리 입구에는 대문이 없다. 대신 ‘5465’라는 지번이 적힌 말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옅은 연두색 가림막을 활짝 열어놓고 손님을 맞았다. 산불 피해는 커녕 오히려 평온한 느낌이다.
이곳 와이너리 역사는 짧다. 캘리포니아 자동차 중개상인 ‘핸젤 오토’의 오너, 월터 핸젤이 1978년 집 주변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한 것이 시발점이다. 본격적인 와이너리 설립은 1996년 그의 아들 스티븐 핸젤에 의해 이뤄졌다. 첫 빈티지는 1998년에 나왔다. 현재 총 면적은 32만3749m2, 4개의 샤도네이(클론(긴 세월이 지나면서 기존 품종에 특별한 성질이 더해진 것) 품종 7개) 밭과 6개의 피노 누아(클론 6개) 밭을 경작하고 있다.
“올해 캘리포니아 지역 와인메이커들은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때아닌 이상 고온과 가뭄에 시달렸거든요. 9월 초에는 한낮 기온이 40℃ 가까이 올라 포도 재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티븐 핸젤의 하소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도 수확 직전에는 비가 왔다고 한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이중의 고통을 받았어요. 그 와중에 이번엔 산불까지 겹쳤으니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일조량이 와인 맛과 향 좌우
월터 핸젤 와이너리가 속한 ‘러시안 리버 밸리’ 지역은 포도 재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오전이면 바다에서 올라온 안개 덕분에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고, 주변 온도도 낮아 이곳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차가운 기후를 좋아하는 피노 누아나 샤도네이 품종을 재배한다.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월터 핸젤 외에 키슬러와 윌리엄 셀럼, 델린저, 로치올리 등을 ‘캘리포니아 지역 최고의 부르고뉴 스타일 와이너리’로 꼽기도 했다. 실제 월터 핸젤 와이너리의 케이힐 레인 빈야드에서 생산된 샤도네이는 농축미와 숙성미 등 품질이 뛰어나 미국 와인시장에서 각광을 받기도 했다.
“남측과 북측 각 경사면에 위치한 슬로프에 비치는 태양의 위치는 물론 일조량이 다릅니다. 이는 온도 차로 이어져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성격의 와인이 생산됩니다.”
기후와 테루아의 성격을 최대한 살려 와인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와인 테이스팅은 행복한 시간
그렇다면 과연 월터 핸젤 와인은 프랑스의 자존심이라는 부르고뉴 와인 맛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야외 데크에서 진행된 테이스팅은 스티븐 핸젤이 직접 주관했다. “디종 클론을 배제하는 다른 소노마 와이너리와 달리 각 구역별 테루아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해 클론을 결정했다”며 월터 핸젤 와인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전형적인 농부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비뇽 블랑이 가장 먼저 나왔다. 첫 모금에서 단박에 흰꽃 아로마를 잡았다. 사과와 살구 향이 가득하다. 지난 1월 병입한 와인이지만 컬러와 바디감은 올드 빈티지 못지 않다. 왜 이럴까. 그 이유가 궁금해 손을 들었다.
“소비뇽 블랑의 경우 수확시기를 최대한 늦춥니다. 그렇게 하면 진한 맛과 함께 샤도네이와 같은 황금빛 컬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스티븐 핸젤의 설명이다.
다음은 무명이나 다름 없던 월터 핸젤 와이너리를 세계 시장에 알린 주인공, 케이힐 레인과 노스 슬로프 샤도네이 두 종류가 나왔다. 스티븐 핸젤은 “케이힐 레인은 오랜 전통의 웬티 클론을 적용했어요. 테루아 특성과 결합되면서 농축, 숙성미가 부르
고뉴 어떤 와인에도 뒤지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나온 와인은 월터 핸젤 최고 제품, 사우스 슬로프와 퀴베 앨리스의 두 종류 피노 누아. 주인공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났다.
“퀴베 앨리스는 고도가 가장 높은 구획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해 양조합니다. 최상급 단일 구획 와인을 사용해 풍부한 향과 탄탄한 구조감이 특징이죠.”
스티븐 핸젤의 설명이 이어진다. 와인 테이스팅은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다. 스티븐 핸젤 역시 설명에 집중하면서 대형 산불의 공포감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 보였다. 와인이 주는 매력이다.
월터 핸젤’ 오너 겸 와인메이커 스티븐 핸젤
“와인 가격은 클론과 테루아가 결정합니다”
캘리포니아 산불 피해 지역이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나파 밸리와 산타로사 동부지역 일부 와이너리가 전소된 것 외에도, 카베르네 소비뇽 등 만생종을 재배한 농가에서는 미처 포도 수확을 못 해 피해가 더 커졌어요.
다행히 월터 핸젤 와이너리까지는 불씨가 날아들지 않았고, 산불 발생 2주일 전에 포도 수확을 대부분 마쳐 연기 피해도 없었습니다. 피노 누아는 현재 저장고에서 안전하게 발효 중이랍니다. 이전과 똑같은 품질의 2017년산 월터 핸젤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 같군요.
화재나 연기는 포도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그 영향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납니다. 과거 사례를 돌이켜 보면 포도 잎이 연기를 흡수하면 결국 뿌리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거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병입 후 1년이 지나면 다소 불쾌한 담배 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피노 누아 와인의 경우 투명함이 사라지고, 맛도 끈적거려 제값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약 우리 밭에 연기가 퍼졌다면 포도 수확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올해는 포도재배 조건이 좋지 않았어요.
우리 와이너리는 포도 수확 시기와는 별도로 이상 고온현상이 나타나면 즉시 물을 줍니다. 수분이 포도 생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요. 포도 나무 한 그루당 하루에 약 15L의 수분을 보충하는데, 그야말로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덕분에 포도나무들이 가뭄에 시달리지 않고 잘 자랐습니다. 사람도 더위에 지쳤을 때 물을 자주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됩니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포도나무는 그 특성상 수확시기를 늦추거나 얼마간 휴지기를 거치고 나면 금방 생기를 다시 찾습니다.
각 제품별 가격 책정 기준이 따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품별 가격은 생산 단가 외에도 클론과 테루아로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피노 누아 에스테이트의 경우 퍼몬클론을, 사우스와 퀴베 앨리스 슬로프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디종 클론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가격이 높다고 해서 꼭 맛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죠. 자신의 취향에 맞는 클론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로버트 파커는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와이너리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와인 가격을 올리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가능하면 젊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와인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품질은 더욱 개선됐습니다. 같은 기간 주변의 다른 와이너리에서는 최고 5배까지 가격을 올렸죠. 요즘 와이너리에서 일하려는 젊은 사람이 없어 고민이 많습니다. 결국 생산단가를 줄이기 위해 기계수확을 잠차 늘려가고 있습니다.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 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 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 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