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 누아' 속엔 아버지 사랑 가득

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폭염은 무사히 넘겼지만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온몸이 고통스럽다. 한여름보다 더 더운 날, 겨울 이야기를 하면 다소 시원해질 수 있을까.

함박눈 내리던 지난겨울, 서울 강북지역 소재 한 강의실에서 학생 20여 명과 와인 테이스팅 기회를 가졌다. 준비한 와인으로는 ‘피노 누아’ 몇 병과 간단한 치즈 안주가 전부였다. 비록 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배움의 열기로 꽉 차있었다. 다들 와인 잔에 코를 들이박고, 향과 맛을 잡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던 것. 와인이 주는 매력이다.

드디어 개별 발표시간.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느낀 소감을 솔직하고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중간쯤 지났을까. 30대 후반의 한 학생의 말에 소란스럽던 강의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이 와인은 마치 아버지가 뒤에서 안아주는 것 같은 푸근한 느낌이 있군요”라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살짝 흘렸다. 이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이번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마치 장마철 장대비처럼 눈물을 펑펑 흘렸다.

와인은 가슴으로 마시는 술

흔치 않은 광경이어서 사연이 궁금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약 1개월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물밀듯이 쏟아졌지만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 가슴에 담고만 있었다고 한다. 오늘 와인 속에서 그 시절 아버지의 향기를 느껴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와인은 가슴으로 마시는 술’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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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긴 피노 누아 와인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먼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피노 누아 ‘월터 핸젤 에스테이트’를 꼽을 수 있다. 월터 핸젤의 경우 열대 과일 향과 견과류의 은은한 풍미가 오래도록 입안에 맴돌면서 행복감을 준다.

초반에는 약간 높은 산도를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러운 맛을 낸다. 별 노력을 하지 않고도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달콤한 향신료, 잘 익은 딸기 향을 잡을 수 있다. 끝 부분에는 딸기잼 같은 진득한 향이 올라온다. 와인 초보 여성에게 딱 맞는 스타일이다.

미국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로마네 콩티와 견줄 만한 훌륭한 와인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가격이 저렴하다”고 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월터 핸젤은 역사가 짧은 와이너리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 자동차 딜러 그룹 핸젤 오토의 오너인 월터 핸젤과 아들 스티븐 핸젤이 소노마 러시안 리버 밸리에서 설립했다. 2년 후 프랑스 부르고뉴 스타일의 첫 빈티지 제품을 생산했다. 현재 샤도네이와 피노 누아 와인을 각각 다섯 종류씩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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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후 10시간 지나도 짱짱

다음은 피노 누아의 본고장에서 만든 ‘부르고뉴 샹송’을 살펴보자. 다소 복잡한 풍미를 가지고 있는 와인으로 밝고 투명한 석류 빛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르고뉴 북쪽에 위치한 코트 드 뉘와 코트 드 본 양쪽 지역의 포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부르고뉴 최고의 피노 누아’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지역의 기본은 완숙한 체리 또는 크랜베리 같은 붉은 과실 향이다. 허브 향과 오크의 느낌, 볶은 커피의 아로마를 빼놓을 수 없다. 다소 직선적 분위기로, 좀 기다려야 제맛을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좀더 풍부한 향과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약간 높은 온도(17~18℃)에서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 와인 마개를 따놓고 30분 정도 기다리면 풍부한 붉은 과실 향이 술술 올라온다. 타닌이 부드러워지면서 피노 누아의 섬세함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개봉 후 10시간이 지나도 짱짱한 맛을 유지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보관기간은 약 5년으로, 어울리는 요리로는 닭고기나 오리고기 등 가금류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 삼겹살과 돼지고기 요리도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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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오’ 풀바디, 짙은 컬러 특징

끝으로 칠레 와인 ‘오시오’. ‘재배하기 까다롭다’는 단점을 극복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피노 누아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부르고뉴 도멘 자크 프리외르와 코노 수르 와인 메이커 아돌포 후르타도, 그리고 칠레 최고의 떼루아가 함께 빚어낸 걸작품이다.

와인 초보자라도 첫 모금에서 잘 익은 딸기 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와인을 잘 아는 전문가라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피노 누아에서 어떻게 이런 풀바디 느낌과 짙은 컬러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집중하면 루비 컬러와 블랙 계열의 과실 향을 느낄 수 있다. 그와 함께 오크 숙성에서 나오는 스모키 향과 어울려 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입안에서는 훨씬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라즈베리와 자두의 풍미가 두드러진다. 잘 익은 과일 맛의 산도와 당도, 타닌이 서로 어울려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매끈하게 이어지는 질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오픈 후 당장 마셔도 좋다. 3~4시간 열어두고 마시면 끝 부분에서 피노 누아 본연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칠레에서도 서늘한 지역 중 하나인 카사블랑카 밸리에서 100% 손 수확으로 재배된 포도를 사용했다. 14%의 알코올, 14개월의 프렌치 오크 숙성, 묵직한 병 모양에서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발사미코 마늘과 프린제를 곁들인 양갈비구이’와 함께 마시면 좋다. 양갈비 특유의 풍미와 질감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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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와인칼럼니스트.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 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