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칼럼니스트 박상현의 한끼의 위로
일본 남쪽의 작은 섬 야쿠시마(屋久島)에서 겪은 일이다. 규슈 최남단에서 70km 정도 떨어진 이 섬에는 무려 7000년 넘게 살아온 삼나무가 있었다. 삼나무를 보기 위해 왕복 10시간 정도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적어도 새벽 5시에는 출발해야 안전을 담보할 수 있었다. 시간보다 더 큰 문제는 비였다. 야쿠시마는 신이 하루를 더 허락해도 비가 온다는, 그래서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섬이다.
새벽 어스름을 뚫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상대로 비가 내렸다. 그저 폭우로 변하지 않기만을 바랐건만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빗속을 뚫고 숲길을 걸은 지 꼬박 5시간.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도 인간의 배고픔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미리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다. 주먹밥에 몇 가지 반찬. 몸은 젖었고 밥은 식어 있었다. 그나마 쑤셔 넣어야 몸이 버틸 것 같았다.
야쿠시마에서 만난 소울푸드, 깻잎 통조림, 초콜릿, 커피
생존을 위한 밥이니 먹는 즐거움 따위는 사치라 생각되던 찰나.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를 타고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전해 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준비해온 통조림 깻잎을 딴 것이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깻잎으로 향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강렬한 욕망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다행히 통조림의 주인은 더불어 사는 법을 아는 이였다. 빗속에 깻잎무침이 두 장씩 배급되었다. 생존을 위해 쑤셔 넣던 밥에 생기가 돌았다.
"깻잎 두 장이 어지간한 산해진미보다 낫다." 누군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어이없는 상황에서 모두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음식의 맛은 때와 장소가 결정한다는, 숲이 깨우쳐 준 첫 번째 음식의 본질이었다.
길을 나선 지 6시간 만에 삼나무 앞에서 섰다. 시간의 흔적은 나무의 크기가 아닌 표정에서 드러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척박한 곳에서 홀로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 심중을 헤아리는 것은 애당초 불가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잠시 그쳤던 비는 폭우가 되어 다시 내렸다. 감정을 수습하고 작별인사를 할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나온 길만큼 다시 가야 하는데 비의 양이 심상찮았다. 출발 지점까지 두어 시간이 남았을 즈음 오한과 함께 손끝과 발끝이 저려 왔다. 8시간을 꼬박 비를 맞았으니 몸은 이미 몇 시간째 젖어 있었다. 구체적인 증상은 몰라도 '이런 게 저체온증인가?' 싶어 걱정이 몰려왔다. 앞으로 남은 여정 동안 몸이 버텨줄지도 막막했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초콜릿을 건넸다. 말 그대로 덥석 받아먹었다. 달콤함의 효과는 빨랐다. 온몸에 잠시나마 온기가 돌았고 손끝과 발끝의 감각도 차츰 돌아왔다. 과하면 탈이 나지만 모자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음식의 두 번째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초콜릿으로 보충한 열량이 떨어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출발점을 목전에 둔 간이 휴게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숨 돌릴 틈이 찾아왔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도무지 믿기 어려운 향기가 비강을 자극했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처럼 향기 나는 곳으로 눈길이 갔다. 일본인 등산객이 휴대용 도구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관심은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먹방과 쿡방… 음식의 본질을 생각한다
내 욕망은 염치를 잃었고 노골적이었다. 일본인 등산객은 그 욕망을 읽었다. 그는 자신이 마시던 커피를 기꺼이 나눠 주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냉큼 받아 마셨다. 두어 모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신선한 원두의 맛과 향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드는 듯했다. 생애 최고의 커피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생존을 걱정하던 인간이 어느새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삶이 모순이듯 음식을 대하는 인간의 욕망 또한 모순투성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의 세 번째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숲에서 느꼈던 경이로움도, 7000년 된 삼나무의 표정도 점점 흐릿해져 간다. 하지만 숲에서 먹었던 깻잎과 초콜릿과 커피에 대한 기억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요즘 '먹방'이니 '쿡방'이니 하며 음식이 오락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음식의 본질보다는 음식이 가진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 이 호들갑스러운 세태를 볼 때마다 나는 야쿠시마를 떠올린다.
음식의 진정한 맛과 가치는 풍요로움보다는 결핍에서 오히려 선명해진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야쿠시마의 숲에서 깨달은 음식의 본질이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미각에 둔감하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시절이다.
/박상현
음식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맛 칼럼니스트. 현재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여행자의 식탁'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대중에게 맛깔 나는 맛 얘기를 들려 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