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V와 마징가Z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릴 적 한 번쯤 생각해봤을 얘기다. 두 로봇을 싸우게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골프에서의 상상은 가끔 현실이 된다.
세계 랭킹 1위 리디아 고와 세계 랭킹 2위 박인비가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열혈 골퍼들의 상상은 곧 현실로 이어졌다. 지난 3월 8일 리디아 고와 박인비가 싱가포르 센토사GC에서 우승컵을 놓고 맞붙었다.
세계 랭킹 3위 스테이시 루이스도 한 팀이 돼 붙었으니 말 그대로 '빅3'가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이다. 빅3의 대결도 대결이지만 무엇보다도 리디아 고와 박인비의 용호상박이 더 눈길을 끌었다.
최근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로 비유될 만큼 겁 없이 질주하고 있는 리디아 고와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며 정상을 노리고 있던 박인비가 보기 좋게 맞붙었으니까. 리디아 고는 창으로 비유될 만큼 공격적이었고, 박인비는 방패로 표현될 만큼 안정된 플레이를 펼쳤다.
초반 창이 강하면 승리,
후반으로 끌려가면 방패가 유리
일단 리디아 고가 예리한 칼끝으로 박인비를 공격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2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디아 고가 4번, 5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낚으며 박인비와 공동 1위에 올라섰다. 리디아 고의 강한 위협이 성공한 셈이다. 이어서 기선을 제압하는 리디아 고의 2차 공격이 시작됐다.
7번 홀에서 강력한 샷을 앞세워 버디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박인비도 똑같이 버디를 성공시키면서 공동 선두를 유지했다. 만약 박인비가 단독 선두를 내줬다면 어쩌면 7번 홀이 승부처가 될 뻔했다. 전반 아홉 홀에서 리디아 고가 끊임없이 공격적으로 나왔지만 박인비는 절대 끌려가지 않고 자기 스윙을 하면서 공동 선두를 이어갔다.
결국 창이 방패를 뚫지 못한 것이다. 박인비는 11번 홀에서 6m짜리 어려운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면서 단독 1위로 올라섰다. 전반에 성공적인 공격을 못 한 리디아 고는 12번 홀과 13번 홀에서 연속 보기를 범하면서 무너졌다. 사실상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이후 15번 홀과 18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추격했지만 박인비를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다. 박인비는 이날 단 한 개의 보기도 범하지 않았다. 아니 4라운드 내내 보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 창이기보다는 방패 역할을 하면서 기회가 오면 안정된 퍼트로 버디를 기록한 것이다.
박인비가 이길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
리디아 고와 박인비가 맞붙는 건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아니 전 세계 골프 팬들도 아주 재미있게 관전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혹을 가졌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 출신 여자 프로 골퍼들은 어떻게 저리도 잘 치는지 모르겠다'는 놀라움 말이다.
도박사들은 리디아 고와 박인비의 우승을 놓고 적잖은 내기를 걸고 결과를 지켜봤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누가 이기겠냐?"는 질문을 했을 때 서슴없이 박인비가 승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박인비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리디아 고에겐 없고 박인비만 가진 것이 있다. 골프엔 있고 다른 스포츠에는 없는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박인비에겐 13승이라는 전리품이 있다. 그중에서도 절반은 메이저 타이틀로 챙긴 우승컵이다. 수많은 상황과 역경을 만났을 때 잘 극복하면서 얻어낸 LPGA 13승은 하루아침에 이룬 게 아니다.
반면 리디아 고는 이제 막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한 쇠와 같다. 너무 뜨거워서 잘못하면 데일 수 있다. 이미 박인비는 그 뜨거움에 데이기도 하고 빨리 식기도 하면서 단단한 쇠로 변해왔다. 다시 말해 리디아 고가 갖고 있지 못한 노련함과 연륜이 있기에 뜨거운 상대를 어떻게 식히는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른 스포츠는 일단 젊고 힘이 좋은 팀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골프는 그렇지 않다. 나이가 많아도 힘이 없어도 그리고 키가 작아도, 젊은 사람을 힘이 많은 사람을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스포츠다.
특히 골프만큼 경험이 중요한 스포츠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말해보면 축구나 야구 그리고 농구는 온 가족이 함께하기 힘들다. 하지만 골프는 70대 어르신부터 10대 손자까지 함께 운동해도 크게 실력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72홀 노(No) 보기 우승, LPGA 사상 첫 대기록
박인비는 이번 HSBC 위민스 챔피언십에서 세계 랭킹 1위인 리디아 고를 꺾은데다 엄청난 기록까지 작성했다. 4라운드 72홀 노(No) 보기 우승 기록이다. 이는 LPGA 사상 첫 번째 대기록이다. 특히 이 기록은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3위가 마지막 날 챔피언 조에서 맞대결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더욱 값지다.
72홀 노 보기 우승은 100년의 역사가 넘는 PGA 투어에서도 1974년 리 트레비노(미국)가 취리히클래식에서 딱 한 차례 작성했을 정도로 진기록 중의 진기록이다. 야구의 퍼펙트게임보다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박인비가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리디아 고와 함께 장타를 날리고 달려들었다면 노 보기 기록과 우승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강한 정신력으로 자신을 다독이면서 최후에 웃는 승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박인비의 우승은 당연했다. 앞으로 10년 후에 리디아 고가 또 다른 유망주와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박인비처럼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레저신문> 편집국장.
시인이자 골프 전문기자로 28년째 신문과 인터넷에 전문 칼럼을 쓰고 있다. 문인 협회 회원이자 대한골프협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서원밸리골프장에서 골프장 최초로 그린 콘서트를 열어 14년째 진행하며, 국내 최초로 연예인 구단을 만들기도 했다. <조용필 그대의 영혼을 빼앗고 싶다> <시가 있는 골프> <골프장으로 간 밀레와 헤르만 헤세> 등 10여 편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