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 동호회
체감온도 영하 15℃,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던 싸늘한 축구장에 두꺼운 외투에 털모자를 쓴 어르신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지만 외투를 벗고 붉은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순간, 그곳에 더 이상 어르신은 없었다.
지난 2월 8일, 경기 시작을 30분 앞두고 축구장에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마스크와 방한모자로 얼굴을 꽁꽁 감췄지만 틈새로 보이는 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파인 주름은 그들의 나이를 가늠케 했다. 경기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대한노인회 서울시 연합회 축구팀’ 강만종 감독. 강 감독은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스탠드에 올라서서 회원들을 맞이했다. 추운 날씨 탓에 회원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던 강 감독의 걱정과 달리 23명의 회원 중 15명 남짓한 회원들이 환한 얼굴로 그라운드에 모여들었다.
“건강하셨습니까?” 60세부터 81세까지 남다른 연령층의 회원들은 인사말부터 남달랐다. 강 감독은 “아무래도 회원들의 나이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가장 큰 관심사도 건강이다. 특히 오늘처럼 날이 추울 때는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볼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라며 흐뭇한 표정으로 회원들을 바라봤다.
날이 추워도, 기절을 했어도 좋아서 한다
경기를 준비하는 회원들 사이에서 유독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 팀의 최고령 회원인 최성원 씨였다. 대한노인회 서울시 연합회 축구팀의 단장을 맡고있는 올해로 81세인 최 단장은 축구팀의 초창기 멤버로 30년째 이 동호회에 참여하고 있다. “추운 날씨에 축구하러 간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한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나” 하며 아이처럼 웃는 최 단장의 열정은 20대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최 단장은 단순히 축구를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한 최 단장은 서울시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다.
최 단장의 못 말리는 축구 사랑은 지난해 2월 경기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에서 빛을 발했다. 최 단장은 경기 중 상대편 선수가 찬 공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에 맞았다. 그럼에도 경기를 끝까지 마치고 싶던 그는 20분간 경기를 더 뛰었다. 경기를 마치고 나온 최 단장은 계단에서 정신을 잃었고 일주일간 기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겪었으면 축구를 포기할 법한데 그는 몸이 낫자마자 다시 그라운드로 나섰다.
최 단장은 “축구는 내 청춘을 함께한 취미활동이자 노년기를 함께한 인생의 동반자다.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는 공을 차고 싶다는 게 요즘 나의 가장 큰 소망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풀기 위해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전역 노인들의 활력소 되고파
에디터가 취재를 간 날은 노원구 지역 축구회의 초청으로 친선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대한노인회 서울시 연합회 축구팀은 30년 전 ‘한국 그랜드 원로 축구단’이라는 팀명으로 시작해 2010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
2012년 공주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축구팀으로서 각 지역구 축구팀에서 내로라하는 감독, 회장, 단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동호회 창립 이후 꾸준히 각 지역구를 돌며 지역구 축구 동호회와 함께 친선경기를 벌이고 있다. 강 감독은 “노인이라고 해서 경로당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이 축구팀에 더욱 애착이 있다. 퇴직 후 가만히 앉아있기보다는 축구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한노인회 서울시 연합회 축구팀은 단순히 지역을 돌며 축구를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축구 코칭을 통한 재능기부와 환경미화 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다. 강 감독은 “축구를 통해 우리 회원들이 건강을 찾게 됐다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며 “단순히 축구를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서울 전역의 노인들이 야외로 나와 삶의 활력을 찾도록 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경기장 안팎을 아우르는 ‘청춘’들의 열기
삼삼오오 모여 몸을 풀던 회원들은 경기를 앞두고 두꺼운 겉옷을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붉은 상의에 파란 하의 유니폼을 입은 회원들의 표정은 마치 월드컵 경기를 앞둔 국가대표처럼 진지했다. “이기려고 축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치던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경기는 25분 경기하고 10분 휴식시간을 갖는 것으로 2시간가량 진행됐다. 경기가 시작되자 매서운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축구장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11명의 선수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전력을 다해 뛰어 다녔다. 태클이나 거친 몸싸움도 눈앞에서 펼쳐졌다. 시합의 열기는 경기장 밖으로까지 이어졌다. 팀 코치뿐 아니라 후보 선수들까지. 누구 하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그라운드 가까이 와서 함께 뛰고 서로를 격려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25분 경기가 끝나고 쉬는 시간. 벤치로 들어오는 회원들의 마음은 아직 축구장에 있는 듯했다. “거기서 패스를 잘했어야지!” “오른쪽 윙이 비니까 수비가 어려워지는 거 아냐!”하며 숨 가쁜 경기의 아쉬운 점을 토로하고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다. 어르신 중 몇 명이 자연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버스나 지하철이라면 자리를 내드려야 할 어르신들이 바닥에 앉다니….
그 이유는 간단했다. 60대 어르신도 이 축구팀에선 ‘젊은이’이기 때문이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선수들은 다시 그라운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기고 돌아올게!”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축구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등은 그 어떤 청년의 등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