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아닌 병원으로 돌아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환자에게 행복주는 게 내 꿈”

지난해 10월 대전선병원의 국제검진센터. 4층 야외 테라스에 팔에 링거를 꽂은 암환
우들이 둘러앉았다. 연미복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든 남성이 간이무대에 나타나자 환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바이올린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병원인지, 전문 클래식 연주회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주자는 다섯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다녔으며, 갈라미안 교수에게 지도 받은 ‘바이올린 신동’ 선형훈(50·대전선병원 문화이사)이다. 그는 왜 예술의전당이 아닌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환우 앞에서 연주를 하는가.

바이올린 천재 소년, 30년 만에 연주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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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훈 문화이사

대전선병원의 선형훈 문화이사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한때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마음을 이해하게 한’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13세 때 미국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해 우리나라의 정경화, 김영욱을 비롯해 이차크 펄먼, 핑커스 주커먼, 폴 주코브스키 등 20세기 후반 바이올린 거장을 길러낸 이반 갈라미안 교수에게 지도받았다.

하지만 갈라미안 교수가 1981년 갑작스레 타계한 뒤 선 이사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음악이 아닌 심리학, 철학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동요되기도 했다. 급기야 음악이아닌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일본, 하와이, 유럽 등을 돌아다녔다. 그 후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에서 손을 뗐다.
 
암환우 앞에서 화려한 재기
선 이사가 다시 바이올린에 손을 댄 것은 2011년 10월이다. 외국을 떠돌다가 잠시 귀국했을 때였다. 형인 선승훈 대전선병원 의료원장이 병원의 암병동 환우를 위한 연주를 부탁했다. 선 이사는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우들에게 음악을 통해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선 이사는 30여 년 만에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게 됐다는 생각에 매일 새벽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연주회 전날은 가벼운 소화불량을 겪기도 했다. 연주회 날, 선 이사는 병원 국제검진센터 암병동 로비에 마련된 무대에 올랐다. 연주를 시작하자 암환우와 가족 200여 명이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선 이사의 선율을 느꼈다.

선 이사는 “연주하면서 본 환우들의 모습은 더없이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환우들과 내가 마음으로 깊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바이올린 소리를 통해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클래식 흐르는 ‘정원 같은 병원’ 만들어
첫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 이사는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치료뿐 아니라 음악회 같은 문화 요소도 크게 작용함을 깨달았다. 이는 곧 병원 내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대전선병원은 그에게 ‘문화이사’라는 직책을 줬다.

선 이사는 “문화이사라는 직책을 만든 병원은 대전선병원이 유일할 것”이라며 “환자가 자주 드나들고 매일 생활하는 곳이니만큼 환경이 중요한데, 이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했다. 이때부터 선 이사는 본격적으로 연주회를 기획해, 3개월에 한 번씩 병원 또는 대전 예술의전당 등 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질 높은 수준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피아니스트, 성악가, 오케스트라를 초빙하고 직접 바이올린을 켜서 훌륭한 협연을 만들었다.

환자가 듣고 싶어하는 곡을 선곡해 들려 주고 해설도 덧붙였다. 밝고 이해하기 쉬운 곡부터 깊이 있는 곡까지 폭넓게 다뤘다. 병원 환경도 개선했다. ‘병원 냄새’가 나지 않게 포르말린 냄새를 빼고, 늘 누워 있는 환자들의 눈이 피로하지 않게 실내등을 간접조명으로 바꿨다. 병원 한가운데 피아노를 놓고 피아노 주변에 작은 호수처럼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외래진료실 앞에 실내정원을 조성해 환자들이 기분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병원 옆 공원의 오솔길이 병실에서 보이도록 창문 위치도 고려했다. “음악과 환경이 지닌 치유의 힘을 제대로 느끼고 있어요. 병원 내 환경 개선에 계속 힘쓰면서, 클래식을 접하기 어려운 환자나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음악봉사’하는 방법을 구상 중입니다. 소리를 다시 갈고 닦아서 많은 사람에게 수준 높은 연주를 해 주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