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떠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단 5일, 프랑스부터 시작하는 전체 순례길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100km 남짓을 걸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 길 위에서 평생의 길벗을 만났다
첫날 페레이로스에서 만난 풍경. 산티아고 성인을 따라 걷는 길은 노란화살표와 십자가가 안내한다.
어느 날 문득 '까미노앓이'
"시차 적응도 안 됐는데 걷기 힘들죠? 발에 물집도 잡히고, 몸도 무겁고…. 지금 당장은 목적지까지 걷느라 길이 좋은지, 어떤 생각도 안날 거예요. 집에 돌아가 한 주 지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문득 산티아고, 이 길이 생각나실 거예요."
그 날 예정된 20km를 걷고 숙소로 돌아가는, 흔들리던 버스 안에서 였다. 어떤 이는 쪽잠을 자고 있었고, 또 다른 이는 양말을 벗고 고단한 발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일행들에게 안내자가 한 말이었다. 자신의 안내를 받아 이 길을 걸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자신조차 그랬노라했다. 당시에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니 까미노를 마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다.
맞다. 한 달 전 나는 분명 그곳에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태양과 쪽물보다 더 푸르렀던 하늘, 싱그러운 숲 냄새, 내일 걸어도 다 못 걸을 만큼 끝이 없이 이어진 길! 눈을 감으니 그 길이 떠오른다. 신기하리만치 생생하다. 이것이 그가 말한 '까미노앓이'일까.
산티아고 입성하는 날이다. 나뭇가지를 꽂아 만든 십자가들이 철조망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찬란했던 까미노
사리아(Sarria). 나의 순례는 사리아에서 시작됐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은 프랑스 작은 마을 생 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묻힌 야고보 성인을 향해 걷는 길이다. 스페인의 북부지역을 가로질러 걷게 되는데, 갈리시아 지방을 포함해 100km이상을 걸으면 순례증서를 준다. 물론 순례증서가 이 길을 걷기위한 목적은 아니지만 말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부터 111.5km 떨어진 사리아는 나와 같은 ‘단기’ 순례객의 단골 출발지다. 이 때문인지 2014년 9월 24일 안개 낀 사리아는 작은 시골 마을답지 않게 북적였다. 우연찮게도 스페인 남부 고등학교 학생 일행과 일정이 겹쳤다. 조잘조잘. 젊은 순례객의 활기찬 기운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나 역시 수학여행 온 학생이 된 듯 설레는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갈리시아 지역 풍광은 제주를 닮았다. 길옆으로는 싱그러운 목초지대, 하얗게 빛나는 유칼립투스 숲, 블랙베리 넝쿨로 뒤덮인 돌담, 징검다리가 놓인 작은 개울, 집집마다 산티아고로 안내하는 노란화살표를 담벼락이나 대문에 그려놓은 마을…. 지루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느라 오히려 분주했다. 걸으면서 동행이 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거웠다. 우리는 이 길의 동지가 아닌가! 순례자로서의 동질감은 마음을 열게 했다. 찬란한 첫날이 저물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객 중 일정이 비슷해 자주 마주쳤던 고등학생들. 활기찬 발걸음으로 그들만의 까미노를 걷고 있었다.
둘째 날은 어제 도착한 포르토 마린에서 다시 일정을 이어갔다. 두 세 사람 앞의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었다. 발은 지속적으로 통증과 피로감을 호소했다. 얼마 걷지 않아 함께 출발한 사람들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안개 속에서 혼자가 됐다. 노란화살표를 등대 삼아 안개 속을 묵묵히 걸었다. 해가 떠오르자 안개가 서서히 걷혔고, 드넓은 지평선이 조금씩 드러났다. 부드러운 초록 지평선에 점점이 집과 나무가 서있다. 그 풍경을 향해 한없이 길이 뻗어있었다. 내 앞에는 ‘검은 사람’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까미노에서는 순례객끼리 나누는 인사다. ‘좋은 순례길 되세요’ 혹은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정도의 의미다.
까미노는 서쪽을 향해 난 길이기에 모든 순례객은 해를 등지고 걸을 수밖에 없다. 아침이면 전날 피로만큼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내 앞에서 걸어간다. 그러다 점점 작아지고 종국에는 내 뒤에서 나를 응원하듯 함께 걷는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걷는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이다.
나의 그림자를 보고 걷게 되는 까미노.
나를 위로하다
나는 한 번도 그림자를 의식하며 걸어본 적이 없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는 유난히 지쳐보였다. 검은 그림자 속으로 내 지난 인생이 투영돼 보이기 시작했다. 상처, 과거, 관계, 아픔, 어리석음, 후회, 철없음…. 일상에 지쳐, 다른 이와의 관계에 정신이 팔려,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소홀했었다. ‘괜찮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야’란 말로 외면해왔다. 진정한 사과도, 진심어린 위로도 나에게 건넬 생각을 못했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멍들대로 멍들어 검어진 나를 만난 것이다. ‘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입성. 이 날을 위해 준비해온 노란 화살표 옷을 꺼내 입은 소년이 신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인생에 까미노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나의 그림자를 보고 걷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고개 돌려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익숙해져 갔다. 정오를 지나 해가 저물 때 쯤 마을에 다다랐다. 길은 마을 중앙의 아담한 성당으로 이어져 있었다. 조용한 성당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들과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를 찍는 사람들 몇이 있었다. 성당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눈을 감자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에 나 조차 당황스러웠다.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 마음이 차츰 평온해졌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운 진공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페인의 자원봉사자가 눈인사를 건넸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모든 순례자가 그랬듯이 당신도 그렇군요’란 말을 하는 듯했다. 반신반의하면서 찾은 길이었지만, 까미노는 내게도 다른 순례자와 같은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층 평온해진 마음으로 남은 3일을 더 걸어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했다. 여행객의 설렘도 사라지고, 말수도 부쩍 줄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나의 그림자와 함께 걸은 5일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산티아고 길은 서쪽을 향해 걷도록 신이 계획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걸어보라는 신의 은총이 깃든 길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은 지난 9월 헬스조선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걷기 100km’프로그램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강미숙 기자가 썼다. 헬스조선은 매년 걷기 좋은 4월과 6월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걷기를 진행한다. 체력과 일정에 따라 200km와 100km 중 선택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1544-1984(헬스조선 문화사업팀)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