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 하면 즐거운 일이 먼저 떠오른다. 용돈도 받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새 옷도 입고, 즐겁지 않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명절에 대해 불쾌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 가족이 모이기만 하면 다퉜다는 것이다. 이는 명절을 불편해하는 며느리가 늘어나는 요즘엔 더 심각하다. 나중에 우리 손주들은 명절을 긴장되고 불편한 날로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사진=헬스조선DB)
그래서 이미 일가를 이룬 4남매 가족이 함께 살면서 지내는 ‘갈등 없고 행복한 명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가 한 지붕 밑에서 산 지 벌써 12년째다. 지금은 모두 5가구 13식구가 함께 모여 산다.
우리가 모여 살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큰아들 내외가 제안한 내용이다.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면 남은 부모를 큰아들 내외가 부양하기로 부부가 합의를 했단다. 합의하고 난 후 이번에는 며느리가 제안했다. 혼자 부양하기 힘들 테니 4남매가 한 집을 짓고 같이 모시면 어떻겠느냐고. 이 역시 모두 동의했다.
자녀들 모두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각자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서로 도와 빌라 형태의 한 집을 지었다. 물론 각 집은 각자의 소유다.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사니 의견 충돌도 있고, 생각이나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설계할 때 토론을 많이 했다.
집 구조는 입주자의 형편과 주장에 맞췄고,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도 정했다. ‘예띠의 집 헌장’이 그것이다. 우리 가족공동체의 헌법이다. 핵심은 상호존중과 불간섭주의다.
이제 곧 추석이니 우리 가족의 명절지내기를 이야기해 보자. 큰 명절로는 설과 추석이 있다. 우리 가족만의 기제사도 있다. 명절에는 우리가 함께 살고 있으니 먼저 모여 제사를 지내고 오후엔 각자의 친정이나 시가에 간다.
부모님 기제사는 6월인데 두 분이 10일 차이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위와 며느리는 할머니만 기억하고 있다. 6월 한 달에 제사가 두 번 든다.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할지 많은 토론이 있었다. 결론은 제사나 명절의 의미가 조상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이라면, 그 방법은 현대에 맞게 변화해서 지내기로 합의했다.
이근후 교수의 ‘예띠의 집’ 헌장
우선 술 대신 차를 올리고 음식은 다섯 가족이 한 가지씩 중복되지 않게 분담해서 준비하기로 했다. 음식의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종교가 각자 다르니 절을 하는 문제도 이슈가 됐다. “각자 믿는 종교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명절이나 제사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힘들기로는 지금 한창 일할 때인 아들딸과 사위, 며느리들이다. 부모 모시랴, 자식 키우랴 샌드위치 신세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 3세대를 놓고 보면 자녀들이 제일 힘들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6개월마다 한 가족이 반장을 맡아 가족의 공동행사나 집 관리를 책임진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역할을 한다. 한 지붕 밑에 살지만 매일 얼굴을 보긴 어렵다. 소통은 주로 이메일로 한다. 중요 결정 사항이나 가족행사 등은 알림으로 전송하면 댓글로 가부를 회신한다.
가족 13명이 한 집에서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좋기만 하겠는가. 일에는 항상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특히 손주들이 “할아버지가 한 일 가운데 이 집을 짓고 함께 살도록 한 것이 제일 잘 한 일이에요”라고 말해줄 때, 사촌지간에 다복하게 잘 어울려 자라는 모습을 볼 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내외는 손주들이 안전하게 자라는 것을 도울 수 있어 즐거웠고, 식사를 도움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출근한다. 점심은 사무실에서 직원과 함께 해결한다. 저녁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큰아들 집에서 함께 먹는다. 주말 저녁은 다른 자녀집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당번을 정해 저녁을 준다.
이렇게 돌아 가면서 가족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우리 내외에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다가오는 추석도 약속대로 지낼 것이다. 올해 제사상에는 무슨 음식이 오를지 궁금하다. 손주들에게 줄 선물은 무엇으로 할지 궁리 중이다. 행복하기만 한 한가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