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치유가 절실한 시대여서 그럴까.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진다. 영혼 없는 볼거리와 터무니없는 물가에 지친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안겨 줄 힐링 도시, 루앙프라방을 소개한다.
루앙프라방(사진=김태정)
루앙프라방의 속살 1. 모두의 평화를 위한 불교
여행을 제법 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루앙프라방은 생경한 도시다. 이 도시가 라오스라는 아직은 좀 낯선 나라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오스는 동쪽으로 베트남, 서쪽으로 태국, 남쪽으로 캄보디아, 북쪽으로 중국, 북서쪽으로 미얀마에 둘러싸여 있는 은둔의 내륙 국가다. 바다하고는 인연이 없는 이 땅에 젖줄이 되어 주는 것은 메콩강인데, 루앙프라방에는 여기에 칸(khan)강까지 합세해 일찌감치 더 깊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잉태했다. 북부 산간에 위치한 루앙프라방이 라오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된 것은 (1975년까지 라오스의 수도 역할을 했다)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제2의 도시라고 해봤자 우리가 생각하는 규모의 도시에는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작은 곳이지만,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8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원으로부터 한때 ‘황금의 도시’라 불리던 시절의 품격과 위엄을 짐작할 수 있다. 과장을 좀 보태 사거리를 하나 지날 때마다 나타나는 사원은 이 도시가 환락의 분위기에 잠식되지 못하도록 엄격한 파수꾼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저녁 노을빛이 내려앉은 메콩강가는 천년고도의 위엄과 노스탤지어로 짙게 물든다.(사진=김태정)
루앙프라방에 온 여행자는 누구나 시사방봉(Sisavangvong) 로드와 사카린(Sakkalin) 로드를 따라 구시가를 거닐게 된다. 주요 사원과 왕궁박물관이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길이다. 호텔과 여행사, 환전소 등이 몰려 가장 번화한 나들목인 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루앙프라방의 삶을 지배하는 불교문화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히는 왓시 앙통의 벽화. 손톱만한 크기로 잘라낸 유리조각으로 세밀하게 표현해낸 부처의 생이 눈부시게 아름답다.(사진=김태정)
라오스는 태국이나 미얀마처럼 남방불교를 믿지만, 여기에 정령이나 조상 등을 믿는 토착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소승불교가 발달돼 있다.
전 국민이 독실한 불교 신자일 뿐 아니라 남자들은 죽기 전에 꼭 한번 사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다. 그러나 라오스의 남자 아이들은 반드시 승려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가기도 한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글자를 깨우치고 외국어 교육까지 받을 수 있으니 형편이 여의치 못한 이들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배움의 장이다.
가는 곳마다 까까머리를 하고 부처 웃음을 짓는 어린 승려들을 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중생들에게 문을 활짝 연 라오스 불교는 이방인에게도 넓은 품을 개방한다.
탁발의식에서 공양하기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공양거리들. 미쳐 준비하지 못한 관광객들에게 판매도 한다.(사진=김태정)
방문자들은 누구나 사원에 들어가 참배하고, 승려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는 접근할 수 없다. 절에 가려면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으나 신성함과 엄격함을 잃지 않고 유지되는 라오스 불교의 유연함이 그저 놀랍다.
루앙프라방 사원 중 가장 아름다운곳은 559년 지어진 왓씨앙통을 꼽는다. 태국식 황금사원에 익숙해진 이라면 낡고 평범한 법당 건물에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천천히 경내를 걷다 보면 화려한 모자이크 벽화 앞에서 한참 머무르게 된다.
곱게 염색된 유리 조각들을 손톱만한 크기로 하나하나 잘라 붙여 완성해 낸 거대한 그림들은 부처의 일생과 권선징악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섬세한 표현 방식과 아름다운 색감 덕분에 회화적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지만,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사방으로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종교미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내는, 그야말로 루앙프라방의 명장면이다.
루앙프라방에서 놓쳐선 안 될 가장 소중한 경험은 이른 새벽 ‘탁발(탁밧.Tak Bat)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승려들이 직접 길에 나서 신도들에게 음식을 공양받는 탁발은 현지인의 하루를 열어 주는 아주 신성한 일상이다.
경건한 탁발의식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루앙프라방에 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사진=김태정)
동자승부터 나이 지긋한 노승까지 주황색 승려복을 입은 승려들이 맨발로 지나가는 동안 신도들이 준비한 음식을 직접 바구니 안에 넣어 주는데, 무릎을 꿇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시주하는 이들은 옷과 음식이 남아도는 이들이 아니라 모두 손과 발에 시커멓게 때가 내려앉은 서민들이다. 부족하나마 가진 것을 나누는 방식으로 매일 덕을 쌓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여는 것이다.
물론 현지인뿐 아니라 여행자들도 이 아름다운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 무릎꿇고 앉기 힘든 서양인들이 땀을 뻘뻘흘리며 공양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음 짓다가도 의식이 시작되면 금방 숙연해진다. 뭐니 뭐니 해도 탁발의 진정한 미덕은 바구니 속의 사랑을 다시 나눈다는 데 있다.
바구니 가득 하루치 음식을 공양받은 승려들은 저 먼발치서 빈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다시 나누어 준 뒤에야 사원으로 돌아간다.텅 빈 바구니가 가득 채워졌다가 이내 다시 비워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감격은 생각보다 크다. 빈곤으로 풍요를 잉태하는 신성한 순환이라니,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원에서 마주치는 금빛 장식은 오랫동안 라오스의 수도이던 루앙프라방의 화려했던 시절을 짐작케 한다.(사진=김태정)
루앙프라방의 속살 2. 원주민의 손길 담긴 순수의 기억
루앙프라방에는 유독 장기 체류자들이 많다. 발리나 방콕 등 서구 여행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동남아 여행지에 비해 아직은 저렴한 숙박비와 물가덕분일 것이다.
라오스 여행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메콩강. 물장구 치는 아이들과 그물 던지는 주민들이 없을 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사진=김태정)
물론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거나(1995), 해외 언론이 ‘죽기 전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앞다퉈 꼽았다는 선전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게다가 입안을 부드럽게 맴돌다 터져 나오는 말랑한 발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자씩 떼놓아도 생경한 다섯 글자의 리드미컬한 조합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니, 몇 번 반복해 발음하는 동안 시나브로 이 이상한 이름의 땅에 매혹되고야 만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 섭렵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루앙프라방에서 며칠을 보내고 싶은 이유는 아름다운 밤 때문이다. 어둠이 내리면 더욱 아름다워지는 사원의 위엄과 메콩강을 따라 즐비한 노천카페의 낭만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오롯한 행복을 선물한다.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루앙프라방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야시장.(사진=김태정)
루앙프라방의 밤이 기다려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밤마다 박물관 쪽 길에서 열리는 나이트 마켓의 흥분 때문일 것이다.
나이트 마켓 대부분이 먹거리 위주인데 비해 이곳의 주요 품목은 손으로 만들어 내는 수천 가지 기념품이다. 나무와 돌을 깎아 만든 장식품과 악기, 부처와 보리수 등을 그려낸 소박한 불화, 색색의 실로 수놓아 만든 아기자기한 직물 등이 주요 품목이다. 그중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것은 현지 아낙들이 직접바느질해서 만들어 내는 패브릭 제품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남방의 꽃들.(사진=김태정)
열대지방 특유의 대담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컬러풀한 색조도 인상적이지만, 도무지 사람이 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세밀한 묘사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중국쯤에서 다량으로 생산한 것을 사다 파는 것이 아닌 가 의심하며 살피다, 노점 한쪽에 앉아 아이를 보면서도 유유히 손바느질하고 있는 젊 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머쓱함이란….
그들은 관광객들 코앞에서 영민한 미술가처럼 수십 가지 색을 다루며, 손가락만 한 크기의 바늘 하나만으로 다양한 조형의 그림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들의 여유로움이다. 루앙프라방 사람들은 달뜬 얼굴과 과잉 친절로 호객행위를 하지도 않고, 없는 말을 동원해 손님의 환심을 사려하지도 않는다.
한국처럼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지 않는 라오서 사람들이지만 다양한 칠리를 향신료로 사용한다.(사진=김태정)
손님이 몰려들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바라보다, 뭔가 물어볼라치면 간단한 영어로 설명해 줄 뿐. 과한 호객 행위가 오히려 뒷걸음질을 부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마음 편하게 시장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을 끌지 말 것. 오후 9시30분이 넘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한다. 아쉬울 것은 없다. 내일 다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맞아줄 테니까.
루앙프라방의 속살 3. 1000원으로 푸짐한 한 끼 ‘여유와 풍요’
자연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 푸짐하게 차려내는 라오스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사진=김태정)
여행자들이 야시장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싸고 푸짐한 먹거리 때문이다. 길 끝 쪽으로 나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지만 번듯한 먹거리 골목이 나오는데, 1000원짜리 물건으로 가득 찬 대형마트에 들어온 것처럼 황홀해진다.
밥이나 국수, 생선요리나 채소볶음 등 푸짐한 요리가 왠만하면 1만 킵(1달러 = 8000킵)이니 1000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푸짐한 한 끼를 만끽할 수 있는 셈이다. 현지 음식이 좀 낯설다면 제법 유럽 베이커리의 손맛이 느껴지는 다양한 빵과 샌드위치 만으로도 충분하다. 구수한 맛이 일품인 라오비어와 진한 라오커피는 은근한 중독성이 있어 떠날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으니 조심할 것.
시간이 조금 더 허락된다면 자전거나 스쿠터를 빌려 타고 몇 시간 정도 돌아보자. 시간이 멈춰 버린 이곳에서 그나마 속도감 있게 루앙프라방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낭만적인 방법이다. 한참 달리다가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면 잠시 쉬면서 땀을 식혀도 좋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루앙프라방 아이들이 다가와 들꽃처럼 해사하게 웃을 것이다.
루앙프라방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박물관. 1975년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왕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사진=김태정)
좀더 시간이 있다면 4000개 불상으로 가득찬 팍오동굴(PakouCave)이나 중국에서부터 흘러 온다는 시원한 폭포수와 에메럴드빛 수색으로 유명한 꽝시폭포(Kuangsi falls)를 들르면 좋다.
더 멀리 코끼리 똥으로 한지를 만드는 마을, 방 안에 베틀을 들여놓고 라오스 전통 천을 짜는 마을에도 가보자. 시사방봉 로드에 있는 로컬 여행사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판매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은둔의 도시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걷고, 앉아서 쉬고,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다.
작은 골목을 누비다 보면 라오스 전통방식의 목조건물과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풍경과 조우하고,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아이들과 가장 평화로운 개와 고양이들을 수시로 마주친다. 그렇게 시내 곳곳을 거닐다 해가 질 무렵, 328개 돌계단을 올라 푸시(Phousi)산에 오르면 메콩강이 굽이쳐 흐르는 시내 전체가 품 안에 들어온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지인답고 여행자답게 루앙프라방을 만끽하는 방식이다.
여행정보
오유리
오유리
출판사 바람 대표. 아프리카 대륙 등을 1년간 여행하면서 다양한 여행 칼럽을 게재해 왔다.
여성 잡지 편집자로 13년간 근무했다.
월간헬스조선 8월호(190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글 오유리(출판사 바람 대표) 사진 김태정 저작권자 ⓒ 헬스조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