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피임약
필자가 겪은 사례를 소개한다. "불안하니 응급피임약을 복용하겠다"고 내원한 여성이 있었는데, 월경 주기를 확인하고 진찰해보니 임신 가능성이 없는 시기여서 몸에 나쁜 고농도 호르몬제를 복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불필요하다"고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 처방전을 주지 않자 "여기만 산부인과냐"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질 출혈 때문에 병원에 온 다른 여성은 출혈이 생길 별다른 원인이 없었다. 최근에 무슨 약을 먹었는지 물어보니, "한 달간 매주 성관계 후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다"고 답했다. 이것이 출혈의 원인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이처럼 막연한 불안감으로 불필요한 응급피임약을 원하거나, 응급피임약을 사전 정규 피임약처럼 복용하다가 부작용이 생긴 여성을 진료실에서 종종 만난다.
월경 주기가 규칙적인 경우 임신 가능 시기를 대략은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여성의 상당수는 직장 스트레스나 비만 관리, 심한 다이어트 등으로 월경주기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자신의 배란 시기를 잘 모른다. 그래서 사전 피임 없이 성관계를 한 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걱정으로 응급피임약을 반복하여 찾게 되는 것이다.
응급피임약 한 알에는 정규 피임약 반 달치의 황체호르몬이 들어 있다. 응급피임약을 먹으면 정규 피임약 15알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는 셈이다. 이 약의 성분인 황체호르몬은 한꺼번에 고농도로 여성의 몸에 들어가면 매우 심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응급피임약을 복용하면 세 명 중 한 명(31%)은 출혈 관련 부작용을 겪는다. 정량을 복용해도 월경과다, 월경외출혈 등 부정출혈이 생긴다. 복통·구역질·현기증·유방 긴장감 등의 부작용도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부작용은 임신 자체이다. 정규 피임약의 피임 실패율이 2%인 데 비해, 응급피임약은 15%에 달한다. 응급피임약을 쓴 여성 6~7명 중 한 명은 임신이 유지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돼서 불법 낙태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응급피임약은 피임약 복용을 잊거나 콘돔이 찢어지는 등 정규 피임에 실패한 경우, 성폭행 등 불가피한 경우 등에 평생 한두 번 쓰는 응급약이다. 만약 응급 상황이 겹쳐도, 월경 한 주기에 한 번 이상 복용하면 안 된다. 여성의 소중한 몸을 지키면서 원치않는 임신을 피하려면, 응급피임약에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사전 피임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