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으면서 테스토스테론의 농도가 급격히 떨어진 평범한 가장 L씨는 아내보다 월화수목 드라마를 챙겨보는 남자다. 얼마 전 탤런트 손예진이 컴백한 수목드라마 첫방송을 아내와 함께 잘 보던 그는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말야, 한가인이 연기가 많이 늘었네. 코믹한 캐릭터도 잘 어울려.” 이어지는 아내의 대답. “뇌에 보톡스 맞았어? 손예진이잖아~”
뭐, 남자니까 백번 양보해서 여자 연예인 얼굴쯤은 헷갈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L씨는 미모에 관한 한 표준 규격이 정해져 있는 한국 여배우들만 구분 못하는 게 아니다. 중․고등학교 동창생들, 거래처 직원들, 딸 아이 친구들, 심지어 오래간만에 만나는 조카들 얼굴도 헷갈린다.
위 사례에 등장하는 ‘복장 터지는’ L씨는 기자의 남편이다. 그는 아내를, 3명이나 되는 처형들과 구분하고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얼굴을 식별하는데 영 젬병인 사람이다. 10년 전에 딱 한번 밥 먹은 사람 얼굴도 기억해내는 타고난 눈썰미의 소유자이자, 자칭 ‘얼굴인식초능력자’인 나와 비교하자면 그는 심각한 안면인식능력장애를 가졌다. 말하자면 비산림전문가들의 눈에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 등이 모두 똑같아 보이는 것처럼 그에게는 한가인, 손예진, 한예슬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일종의 병이다. 증세가 심각해지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누군지 모른다. 의학용어로는 '얼굴맹(face blindness)' 또는 '얼굴인식불능증(prosopagnosia)'이라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야 보고된 질환이기 때문에 아직 이 병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진 것은 아니다.
‘뇌의 기막힌 발견(스티븐 후안 지음)’이란 책을 보면 1993년에 보고된 한 심각한 얼굴맹 환자의 사례가 나온다. 뇌졸중 후 그는 농부가 되어 양떼를 키웠다. 그는 수많은 양들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부를 수 있었지만 사람 얼굴은 양들 얼굴보다 잘 구분하지 못했다.
학자들은 얼굴인식불능증이 귀 바로 아래 우뇌에 있는 아몬드만한 크기의 피질 부위, 즉, 방추회라는 부위가 교통사고나 뇌졸중과 같은 뇌 손상 등으로 인해 생기지 않나 추측하고 있다. 만일 이 부위에 손상을 입었다면 익숙한 얼굴을 인지하지도, 새로운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최근에는 이 병이 특정 가계에서 나타나는 유전 질환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얼마 전 발견한 놀라운 사실 하나. 남편의 이 얼굴맹 DNA가 내 딸에게도 대물림된 것이다(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추노의 ‘장혁’과 ‘장동건’을,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와 ‘유승호’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L씨는 경증의 얼굴맹이라 비교적 견딜만 하지만 증세가 심각한 사람은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는다. 저쪽에서 날 보고 반가워 달려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통 모르겠다면 얼마나 난감할 것인가! 그래서 얼굴맹인 이들은 얼굴 대신 수염이나 머리카락, 안경, 점 등 다른 식별 수단들을 적극 활용한다.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 파티나 동창 모임 같은 곳이 아마 즐거운 만남의 자리가 아니라, 진땀 깨나 뻘뻘 흘리면서 기억과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아찔한 시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창욱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교수는 "얼굴맹도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사람들은 ‘표정맹’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의 표정을 봐도 기분을 알아채는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한 부위인 '아미그달라'라는 곳이 고장 나면 상대방이 화가 났는지, 기분이 좋은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 '눈치가 없다'는 등의 핀잔을 듣기 십상이죠. 이 같은 표정인식장애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흔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주변의 가장들 중 상당수는 적어도 아내에 있어서만큼은 ‘표정맹’이 아닐까. 친정엄마와 한판 싸우고 나서 속상해 있을 때, 직장 상사에게 핀잔을 들어서 기운 빠져 있을 때, 생리 직전이라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을 때, 딸아이가 왕따 당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 이런 다양한 감정과 섬세한 얼굴근육이 빚어내는 미묘한 표정들을 구분하는 남편들이 얼마나 있겠느냐 말이다. 그래도 L씨는 아내가 몸이 안좋아 인상이라도 쓰고 있으면 “어디 아파?”하고 물어봐주니, 심각한 표정맹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약도 없는 얼굴맹 L씨, 가끔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해도 참고 살께요. 제발 표정맹으로 그대의 질병이 전이되지는 말아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