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직장동료 몰래 홀로 투석한 사연

“어떻게 10여 년을 감쪽같이 숨길 수가 있었을까?”지난 6월,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정년 퇴직을 하며 직장 선후배에게 신부전증 환자임을 고백했다. 해외출장 기회도 자주 마다하고, 식사도 함께 하지 않으려 했던‘비밀’을 그제서야 털어 놓자 모두 놀라워했다.

1997년 1월,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노폐물을 걸러내는 신장이 기능을 못하는 병이다. 몸이 붓고, 피부색은 점점 검게 변했다. 몸에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가능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투병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용기를 냈다. 투석을 위해 주 3회씩 병원에 갈 수는 없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복막투석을 시작했다.

투병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을까봐 직장에는 알리지 않았다. 아찔한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우선 집을 연구소 부근으로 옮겼다. 근무시간 틈틈이 집에 들러 투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연구소 부근 야산이나 차 안에서 투석을 했다.

해외 출장 때가 가장 난감했다. 1주일 출장 가려면 투석액 70㎏(하루 4회 총 10L)을 가져가야 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투석액이 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게 사람들은 “금 덩어리라도 들었냐”고 비꼬듯 묻곤 했다.

투석 장소가 일정치 않다 보니 위생에 문제가 생겼다. 발병 후 8년간 복막염이 10회나 생겼다. 복막으로 투여되는 전해질 액 때문에 등은 늘 아프고 가려웠다. 등이 아파 눕는 것이 힘들어지자 불면증도 생겼다. 활동량이 줄면서 몸무게는 8㎏ 정도 늘었고, 음식 섭취가 제한되다 보니 소화도 안돼 음식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루 네 번씩 누워 투석을 해야 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환자라고 시체처럼 누워만 있을 게 아니라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사도 적극 권장해 테니스와 골프를 시작했다. 테니스를 하다 너무 많은 투석 액이 들어가 장이 복압(腹壓)에 눌려 탈장이 생기기도 했다.

운동을 하면서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몸무게도 예전의 70㎏ 정도로 되돌아왔다. 그런데도 몸은 계속 나빠져 가는 것 같았다. 소변량이 반으로 줄더니 작년부터 소변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현재 신장기능은 완전히 멈춰버렸고, 간경화가 있어 신장이식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절망하진 않는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투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퇴직 이후에도 복막투석을 별 무리없이 받고 있다. 아직 체력에는 문제가 없다. 요즘 거의 매일 남한산성 근처 집에서 올림픽공원까지 3시간 정도 걸어간다. 가끔씩 막걸리도 한 잔 들이키는데,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다. 하루하루,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 요즘은 한일관계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다니며 자료수집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변사람에게 투병사실을 당당히 알리지 못했던 내 소심함이 후회스럽다. 직장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받았다면 몸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나처럼 투석 사실을 숨기고 직장에 다니는 ‘후배 환자’가 있다면 당당하게 투병 사실을 알리라고 권하고 싶다.

/ 정리=홍세정 헬스조선 기자 hsj@chosun.com

주치의 코멘트

"일상생활이 가장 좋은 약"

만성신부전 환자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과 그냥 환자 티를 내고 누워 있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만성신부전은 신장 기능이 서서히 나빠지는 과정에서 고혈압 혹은 부종 이외에는 다른 증상이 거의 없다. 그러다 말기가 돼 급작스럽게 다양한 증상이 생기면 이 시기에 투석을 시작한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신장질환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내다 투석 치료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번거롭지만 투석을 받으면 투석 이전에 거의 증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환자는 투석을 하면서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또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그 역할의 수행이 질환의 경과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준다. 복막투석은 이와 같은 의지를 가진 만성신부전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