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22일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강남에서 미용 성형으로 유명한 레알클리닉그룹이 중랑구에 있는 원진재단부설 녹색병원에 매주 정기적으로 성형외과 의사들을 파견, 진료를 지원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원진재단은 1993년 800여명의 산재환자를 내고 폐업한 원진레이온 근로자들이 받은 보상금으로 만든 공익법인. 부설기관인 녹색병원은 산재환자들을 위한 전문 치료 및 지역주민들에 대한 일반 의료를 병행하고 있는 곳이다.
레알클리닉 소속 성형외과 의사들은 매주 목요일 녹색병원에서 진료 및 수술을 하게 된다. 진료에 따른 보수는 녹색병원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지역건강센터 후원금으로 기부된다. 두 병원은 지역주민, 소외계층, 외국인노동자 등에 대한 의료봉사활동도 함께 펴나가기로 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병원이 협약을 맺은 것은 두 원장간의 36년 우정이 밑바탕이 됐다. 레알클리닉그룹의 김수신(金壽信) 원장과 녹색병원 양길승(梁吉承) 원장은 1969년 서울대 의대 신입생으로 처음 만났다.
1949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그러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았다. 지하서클에서 활동하며 ‘운동권’이었던 전남 나주 출신의 양 원장은 집회에 앞서 과별로 토론회가 벌어지면 늘 적극적인 현실참여와 시위참가를 독려했다.
이에 반해 공화당 의원의 아들이었던 김 원장은 시위와 같은 과격한 방법보다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토론회 때마다 서로 반대되는 주장으로 맞부딪치는 관계였다.
“싸우면서 정이 들었다”는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 차이나 사회참여에 대한 이견을 떠나 서로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 관계를 이어왔다. 양 원장은 “내가 운동을 하는 것이나 김 원장이 시위를 반대하는 것 모두 편견이나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며 “서로를 존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이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극단으로 갈렸다. 유신시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년간 복역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투신, 2차례나 제적을 당한 양 원장은 끝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82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특별 보증으로 아일랜드로 건너가 현지에서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86년 한국에서 의사면허를 얻은 뒤, 서울 구로공단 근처에 산재환자들을 위한 우리의원을 개업했다.
반면 김 원장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 서울대 병원에서 성형외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198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유학을 다녀왔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고려대 의대, 인제대 의대 교수를 거쳐 1991년 압구정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성형외과를 개원했다.
1991년과 1993년 2차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한 김 원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미용 성형의사로 돈과 명예를 함께 거머쥐었다. 현재는 3개 병원, 4명의 전문의, 총직원 25명을 거느린 레알 클리닉 그룹의 대표원장이 됐다.
레알클리닉 김수신 원장은 “성형외과 의사하면서 돈 세고 세금 걱정이나 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늘 있었다”며 “외국으로 의료봉사를 떠날 것 없이 국내에서 어려운 분들을 위한 지역의료봉사가 더 확산돼야 한다는 생각에 협약을 맺게 됐다”고 말했다.
(최현묵기자 seanch@chosun )